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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최후의 봉사자들
설교본문 마 21:1-9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4-07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407n.mp3

20190407n

마 21:1-9

최후의 봉사자들


(마 21:1-9, 개정)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4장 3-9절입니다.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 아래 13-16절입니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본문의 사건들 다음주일부터 시작하는 고난주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주님 생애 마지막 주간에 이뤄진 최후의 봉사이자 헌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께 나귀를 바치는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는 어느 여인이 향유를 주님께 부은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4장 13절 이하는 주님의 최후만찬 자리를 제공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최후는 외로웠습니다. 주님을 배신했으면 했지 구명하려고 나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세 사람은 주님께 큰 위안과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야말로 주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헌상을 한 사람들입니다. 


우선 이 세 사람은 다 이름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끝내 이들의 신상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겸허한 무명의 봉사자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헌상이나 봉사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될 만큼 하찮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귀를 헌상한 사람을 보십시오. 그게 우연이 아니라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500년 전에 예언했던 구속사건의 성취입니다. 4절 이하입니다.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500년 전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의 성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귀 주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 나오는 나드 향유를 바친 여인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그녀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 여인이 힘을 다해 내 장례를 준비했다고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적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감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때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인데도 끝까지 무명으로 남습니다. 


다락방 주인도 마찬가집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 주님이 이 땅에서 드셨던 마지막 식사입니다. 그것을 도운 사람이니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주님은 그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지금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도 제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봉사를 한 사람인데도 그 역시도 이름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나귀를 타신 주님, 전신에 나드 향유를 뒤집어 쓴 주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자리에 계신 주님만 보이지 어디에도 나귀 주인이나 여인이나 다락방 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이게 아름다운 봉사자의 모습입니다. 주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이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이름과 얼굴을 선전하느라 좀처럼 주님을 드러낼 겨를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를 과시하고 생색내느라 주님은 항상 뒷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나귀 주인, 옥합 주인, 다락방 주인처럼 언제나 이름 없는 봉사자, 얼굴 없는 헌신자로 남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앞세우고 드러내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참된 헌신자입니다. 


그들은 흠 없고 티 없는 것, 준비되고 예비된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입니다. “...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구약 시대 성전에서는 향유를 많이 썼습니다. 성전에서 쓰는 향유는 그 제조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릅니다. 가장 순수하고 순전한 향유라야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락방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주님의 최후 만찬을 위해 없던 방을 새로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전에 준비된 방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4절 이하를 보십시오.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준비한 다락방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사전에 준비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주님의 최후 만찬을 위해 사전에 예비된 방이었습니다. 주님께는 반드시 준비되고 예비된 방을 드려야 합니다. 임기응변은 안 됩니다. 부디 나귀 주인, 옥합 주인, 다락방 주인처럼 준비되고 순전한 것을 드립시다. 


그들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기꺼이 그리고 몽땅 드렸습니다. 이 또한 헌신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렇습니다. 나귀 주인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향유를 바친 여인도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부었습니다. 아낌없이 온전히 드렸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옥합을 깨뜨려 거기 담긴 향유를 조금은 바칠 수 있지만, 아예 몽땅 바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제자들이 화를 내며 야단을 쳤을까요? 이렇게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주님께 향유를 몽땅 부어드렸습니다. 제자들이 그녀를 책망하자, 주님이 그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그 여인을 온 세대가 기억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다락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일러주신 대로 하자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예비된 다락방을 내줍니다. 우리와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러모로 주님께 인색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쓰시겠다고 하면 지금도 고민하고 상처받고 시험에 듭니다. 예수님이 평소하던대로 걸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좋은데 굳이 나귀를 타고 가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순간부터 시험에 듭니다. 향유도 누군가 덜어서 드리면 괜찮은데 옥합까지 깨뜨려 다 드리면 우리는 그를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다락방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주님이 쓰시겠다 해도 선뜻 그 큰 방을 내줄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생애 최후의 봉사자들은 그렇게 자신을 헌상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귀하게 보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고마워하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그 은혜를 갚습니다. 우리가 이웃에 신세를 져도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주님이시겠습니까? 부디 우리는 이 세 사람의 최후 봉사와 헌신을 기억하십시다. 그들의 봉사와 헌신의 자세와 기꺼운 희생의 태도를 배웁시다. 그래서 늘 주님께 힘과 기쁨이 되는 헌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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