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62
Extra Form
설교제목 두려움과 떨림
설교본문 빌 2:12-1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10-07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320181007n


20181007n

빌 2:12-18

두려움과 떨림


(빌 2:12-18, 개정)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셨고, 바울도 두려워하는 마음은 성령이 준 게 아니라 마귀가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4장 18절을 보면 두려워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두려워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베드로전서나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에게 두려워하며 지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두려워말라는 말씀은 무엇이고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각종 시험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풍랑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를, 왜 두려워하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 물리적인 위협 앞에서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 어떤 존재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세상의 힘 앞에 두려워 떨면 그것은 명백한 불신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행태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의 면전에서 살 때만큼은 떨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세상과 사람, 돈이나 권력, 병, 천재지변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비록 우리 앞에 골리앗이 서 있더라도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하면 이 세상이 주는 상대적인 크고 작은 두려움을 능히 극복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풍랑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20세기의 인류 정신사를 지배했던 철학사조는 1950-60년대를 휩쓸었던 유럽의 실존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논리실증주의나 유물론적 사회철학이 있기도 했습니다만, 실존주의가 훨씬 더 대세였습니다. 실존주의는 역사나 자연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 자체, 인간 개인의 주체성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실존주의는 자유나 책임, 결단을 강조하고 소중히 여겼습니다. 이런 사조가 20세기 중반에 큰 실적을 냅니다만, 그 기원은 19세기에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죄렌 키엘케골,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가 실존주의의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를 우리가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누기도 합니다. 키엘 케골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속하고, 니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속합니다. 이후 실존주의는 칼 야스퍼스, 폴 틸리히, 가브리엘 마르셀이라는 철학자들을 배출합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마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같은 사람들이 20세기를 풍미한 거장들입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기원이라는 키엘케골은 실존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고독한 단독자로 정의합니다. 키엘케골은 인간 실존의 특징을 두려움과 떨림이라 보았습니다. 하나님 면전에 서 있는 인간이니 얼마나 떨리고 두렵겠습니까? 키엘케골의 <죽음에 이르는 병> 못지않게 유명한 책이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키엘케골은 성경의 아브라함을 원초적인 실존의 모델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면전에서 두려워하고 떨며 살았습니다. 그 극치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모리아산까지 가는데 사흘이 걸렸지만 그는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두려움과 한없는 떨림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 반전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산 나머지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세우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굳이 시제를 말하자면 우리의 구원은 과거완료형 구원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완료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게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을 이루는 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님의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현재진행형과 미래완료형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씀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세상 종교는 다 자기의 뜻과 소원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자는 종교입니다. 주님은 최후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말하며 죽음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게 될까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꿈으로 당신 소원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눈앞에 번쩍하며 당신 뜻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그럴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을 배제하면 자기 소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말씀합니다. 원망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시비는 이웃이나 형제와 다투는 걸 가리킵니다. 우리는 툭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바울은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기도하고 찬양했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 붙잡고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사람이 언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웃과 시비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부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이웃과 시비하지 말고 삽시다. 


바울은 기쁨으로 희생하는 삶을 말합니다. 17절 이하입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전제는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물 위에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붓기도 하고, 실제 생피를 붓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의 피를 주님 앞에 부어드린다는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뜻합니다. 여러분,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며 사는 진정한 실존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런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피를 주님 제단에 부어드리겠다는 각오 말입니다. 실제 내 피를 부을 수는 없으니 포도주나 짐승의 생피를 부은 겁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주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의 참 모습입니다. 


부디 늘 바울의 권면대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갑시다.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