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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
설교본문 히 11:36-40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6-10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610n.mp3
20180610n
히 11:36-40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자

(히 11:36-40, 개정)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초대 교회 스데반 집사가 2000년 교회사의 첫 순교자였다면, 134년 역사의 한국 개신교사의 첫 순교사는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입니다. 그는 1884년 알렌 선교사 입국보다 무려 18년이나 앞선 1866년에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다가 평양 대동 강변에서 조선 관군에게 잡혀 참수를 당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지방 라다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공부를 잘 했다고 합니다. 그는 옥스퍼드 의대 장학생을 사양하고 1857-1863년 5월까지 런던대 뉴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1864년 6월 4일에 아버지가 목회하던 고향 하노버교회에서 24세 때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안수 받기 1년 전에는 갑부였던 잉글랜드 영주의 외동딸 캐롤라인과 결혼합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해 8월에 그는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중국 상해로 옵니다. 이듬해 아내가 출산하다가 사망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선임 선교사와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선교본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865년 1-8월까지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관으로 근무합니다. 거기서 그는 조선 상인 두 사람을 만나 결정적인 정보를 얻습니다. 조선에는 5만 명가량의 천주교 신자가 있고, 11명의 사제가 있는데 천주교의 기도문 같은 문서는 있는데 성경은 한 권도 없으며, 개신교회는 한 곳도 없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정보는 토마스를 흥분하게 했습니다. 그는 조선이야말로 자기가 반드시 가야 할 선교지라고 확신합니다. 당장 그해 9월 세관 통역관역을 사양하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선교지 답사 차 조선을 방문합니다. 그게 1865년 9월 13일이었습니다. 그는 서해 백령도 근처 작은 섬에 도착해 2달 반가량 조선말을 익히며 가져 온 한문성경 200여 권을 배포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런던선교회의 정식 선교사로서 다시 조선으로 옵니다. 조선으로 건너올 배편을 찾던 그는 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만나게 됩니다. 1866년 8월 9일에 그는 제2차 조선 선교여행길에 오릅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중국 출항 1주일 만에 대동강 입구 용강 주영포에 도착합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8월 27일 평양 한사정에 정박하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합니다. 이때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쁜 때였습니다. 결국 조선 관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합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합니다. 토마스는 불타는 셔먼호 갑판 위에서 자기가 가져온 성경을 강가로 던지고, 마지막 한 권은 가슴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렸는데 결국 생포되고 맙니다. 격분한 조선 관군들이 제너럴 셔먼호의 승선자들과 토마스까지 다 처단합니다. 

당시 형 집행관이 박춘권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칼을 뽑자 토마스는 자기 품에서 성경책을 꺼내 웃으며 그에게 건넵니다. 그러고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박춘권이 마침내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벱니다. 영국인이었던 토마스는 제대로 조선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꽃다운 27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그의 그런 죽음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조선 땅의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고 목을 쳤던 박춘권은 1899년 평양교회의 영수(장로)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을 주웠던 장사포 홍신길은 서각를 설립했고, 석호정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설립했고, 받은 성경을 찢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널다리교회 예배처로 제공했습니다. 아무튼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 이후 모든 사람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이후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 됩니다. 토마스의 순교의 피가 섞인 대동 강물을 마신 사람들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 기독교 신자가 된 겁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1월 12일 런던 선교회에 보낸 편지 한 대목입니다. “바다 건너 조선이라는 나라의 땅에 선교사 한 명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저를 꼭 그리고 보내주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대동 강변에서 토마스의 목을 쳤던 박춘권의 진술입니다. “내가 여러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이 든다. 내가 그의 목을 치려할 때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노라.” 박춘권이 쓴 보고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평양교회의 유명한 영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특히 우리 한국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잊으면 안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야말로 이 땅에 심긴 최초의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그의 위대한 순교적 신앙을 잘 계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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