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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설교본문 눅 6:20-26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3-04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304n.mp3

20180304n

눅 6:20-26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눅 6:20-26, 개정)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것은 산상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씀처럼 난감한 말씀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잣대로는 이들 모두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본문은 배부르고 부요한 사람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가난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세상인데, 우리가 과연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문이 말씀하는 가난과 부 개념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누가복음과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냥 가난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굶주린 자도 빵이 아닌 의에 굶주린 자라고 하고, 우는 자도 마음이 가난해서 우는 자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가난이 주님의 의도일까요? 누가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처럼 정신적 가난이라기보다는 물질적 가난이라 해석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주린 자도 배고픈 자를 가리키고, 우는 자도 물질적 가난으로 멸시당해 우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런 해석이 문제가 없을까요? 


지금까지 진보적인 사람들은 가난을 누가복음 식으로 해석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마태복음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느 쪽이 주님의 본래 의도일까요? 제가 볼 때는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통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병자를 고칠 때도 병자의 육신뿐 아니라 죄 사함을 통해 그의 영혼도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궁극적 구원도 전인적 구원입니다. 영혼만 영생하지 않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난을 말씀하셨다면 그것 역시 전인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본문 20절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가난과 부요의 개념은 경제사회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하나님 나라 앞에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난과 부요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은 그의 물질과는 상관없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물질 여부를 떠나 그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특히 여기서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제를 놓치지 맙시다. 지금에 목매고 사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 나라에 배고픈 사람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안중에 없고 오직 지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고 화가 미칩니다. 주님을 따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지금이라는 현실에서는 아무 희망을 보지 못하고 오직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기 전에는 어떤 만족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리처럼 부자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기득권을 누리며 절대 변화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하나님의 나라 소식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화를 선언했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너희 위로를 다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까? 이 물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 없는 부요한 자고, 그 반대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을 가난한 사람입니다. 현실보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가난한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꼭 얻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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