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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설교본문 창 22:7-1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9-12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912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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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주일 아침, 다시금 가정예배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신령과 진정을 다하는 산제사가 되도록 예배의 영이신 성령으로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가을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이 환절기에 저희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가사 위로하시며 안수해주시옵소서.

또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정예배마저도 여의치 않은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더욱 큰 믿음을 주사 주일성수와 예배의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코로나19>로 모든 게 힘들어진 가정들, 

특히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의 사정을 헤아리사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결코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하게 하사

주님의 놀라우신 긍휼을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교회도, 또 사회도 하루 속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그 본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메시지 앞에서 바르게 응답하며 결단하여

주님 주시는 위로와 격려를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912m

창 22:7-14

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9월 둘째 주일 아침입니다. 다들 건강하신지요? 벌써 일교차가 커졌습니다. 환절기에 건강 더욱 조심하시고, 틈나는 대로 산책이며 운동 부지런히 하셔서 모쪼록 몸과 마음과 영혼이 주 안에서 늘 강건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자 그럼 오늘도 잠시 본문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본문 7절을 보시면, 이때 약 17세쯤 됐을 어린 이삭이, 물론 본인은 아직 모릅니다만, 자신을 불사를 나뭇가지를 등에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다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어린 양 대신 너를 잡아 바친다는 얘기는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명답인데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심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오자 성어를 뭐라고 했죠? 14절에 나오는 여호와 이레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13절을 보면 정말 아브라함의 말처럼 하나님이 거기에 이미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이삭 대신 그 숫양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지 않습니까? 실로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의 여호와 이레의 원초적인 모범인데. 사실은 오늘 본문인 이 사건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애는 언제나 그렇게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그의 인생의 소중한 전환점, 분기점이 다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본토와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떠나고 봤더니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이라는 목표, 최종 목적지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또 100세가 되도록 자식 하나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이삭이라는 독자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는 내 인생, 내 삶의 모든 필요와 간절한 바람과 소망을 하나님이 친히 최상으로, 최적으로 미리 다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일까요? 여호와의 이레를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은 아하, 하나님이 내 인생을 미리 다 준비하신다니, 그럼 나는 이제 팔짱만 끼고 구경만 하면 되겠네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맞습니까? 아니죠. 아무리 여호와가 준비하신다고 해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됐고, 또 그가 체험한 여호와 이레의 삶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약속되고 보장된 은혜인지를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여호와 이레란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살았던 본토 원적 집이 어디죠? 갈대아 지방인 우르 아닙니까.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유프라테스 강의 하류로 페르시아만 이라크의 남부지방을 뜻하는데, 지금도 역시 우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옛날 그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는 뭘 믿었을까요?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아니면 이방신을 믿었을까요? 주석가들 중에는 아브라함이 그때 하나님을 믿었고, 그의 아비와 종족들은 다 이방신, 당시 갈대아 사람들이 믿었던 달의 신 오르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곳으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는 겁니다. 실제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을 섬겼다고 합니다. 

 

또 유대인들의 오랜 전승에도 당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르에서 그냥 우상만 숭배한 게 아니라, 우상 제조업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르라는 지명도 그들이 섬기던 달의 신 오르에서 온 것인데, 데라가 거기서 그 오르라는 우상을 제작해서 팔았던 장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요? 당연히 아브라함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자기 종족들이 믿었던 오르라는 우상, 그 달의 신을 섬겼지요. 아니 가업이 우상 제조업인데 누굴 섬겼겠습니까? 더구나 철저한 가부장 시대, 종족 시대에 아들이 아버지나 족장의 신앙과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종교를 갖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때는 왕의 종교가 곧 백성의 종교를 결정하고, 족장의 종교가 곧 그 종족의 종교를 결정하고, 가장의 종교가 곧 그 가족 성원들의 종교를 결정하는 시대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아브라함도 그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는 당연히 그의 아버지와 조상들이 섬기던 이방신, 달의 신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전격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우상을 섬기는데 아브라함만 홀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라 다 똑같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콕 찍어 그곳에서 떠나라고 하신 겁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낯선 신의 황당한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 하였으나 나아갔으며” 그랬습니다. 말이 그렇지 그게 쉬운 일입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도 더 되는 고대 종족 시대입니다. 그때는 자기의 본토를 떠나고, 자기 종족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를 뿌리 채 뽑는 것과도 같은 자살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뜬금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서 실제 자기의 본토를 떠났습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인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정말 이 얘기만큼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사건도 없죠. 번제가 어떤 제사입니까? 먼저 짐승의 목을 따서 피를 받은 다음에 그걸 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고기는 부위별로 각을 떠서 제단 숯불에 몽땅 살라 바치는 그야말로 온전한 헌상, 완벽한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아비에게 제 어린 외아들의 목을 따서 피를 받고, 고기는 각을 떠서 숯불에 다 태워 바치라고 합니까? 세상에 이런 참혹하고 엽기적인 얘기가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의 그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추호의 항의도 없이 잡아 바칠 독자 이삭의 등에 그를 불태울 나무를 지우고 지금 묵묵히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다는 겁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따지고 불순종하고 달아날 명분이 많습니까? 아니 하나님이 무슨 피에 목마르고 인육에 굶주린 신이십니까? 어떻게 생사람을 잡아 바치라고 하십니까? 혹은 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다시 번제로 잡아 바치라는 건 또 뭡니까? 아니면 도대체 아비에게 제 자식, 제 독자를 잡아 바치라는 신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고 얼마든지 항의하고 호소할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그는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그 주문에 아무런 문제 제기나 탄원도 없이 무조건 순종합니다. 22장 18절입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네가 나의 말에 순종하였음이니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린 그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절대 거저 주어진 게 아니고, 이렇듯 그의 놀라운, 그의 불가사이한 살인적인 순종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여호와 이레는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복, 여호와 이레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만 주어집니다. 오늘 이 사건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무슨 망령이 드셨거나, 사람의 피에 굶주린 신이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그를 시험하신 사건이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22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러분, 사법고시 백 번 보는 것과 오늘 이 시험 한 번 보는 것, 어느 게 더 어렵겠습니까? 한번 답을 해보십시오. 유사 이래에 이렇게 어려운 시험은 없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내게 번제로 바쳐라. 세상에서 이렇게 혹독한 고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다고요? 본문 9절 이하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내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렇게 해서 그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험을 막 통과하자 바로 거기에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더라는 거죠. 이어지는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6절 이하입니다. “네가 이 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는지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시험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시험이 없으면 진학도 진급도 승진도 없습니다. 힘든 시험, 어려운 시험일수록 그 영광도 그만큼 큽니다. 지금 우리는 다 큰 시험 중에 있습니다. 물론 평균치보다 더 아픈 시험, 더 혹독한 불시험을 겪고 계시는 분도 없지 않아 계십니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외아들을 잡아 바치는 듯한 아픔을 당하고 계시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 내 인생에서 이것이 무너지면 이것을 잃어버리면 끝장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이삭이고 나의 외아들입니다. 건강, 사업, 직장, 남편, 아내, 자식.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그 하늘같은 내 외아들을 통해서 나를 시험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래야 나의 모든 것, 나의 최후의 진실, 나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 나의 본심, 나의 중심을 적나라하게 확인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런 시험을 만나면 절망하고 흔들리고 무너져서 성공하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의 심장보다 100배 1,000배나 더 소중한 외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100세에 얻은 독자를 제 손으로 잡아 바치는 시험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정신줄 놓지 않고 끝끝내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에 자기의 목을 내대며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이레는 결코 우연히 주어지는 행운이 아닙니다. 혹독한 시험을 이긴 자에게 약속된 값진 보상입니다. 시험이란 실패하면 실패한 만큼의 아픔이고 불행이고 비극일 뿐이지만, 이기면 여호와 이레의 무한한 축복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 이레란 반드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대 급부라는 겁니다. 사실 당시 아브라함은 자기의 소중한 외아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믿음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100세에 얻은 내 외아들만큼은 절대 안 된다.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100번이라도 드리겠지만, 내 외아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들 아닙니까? 여기가 바로 우리가 늘 실패를 거듭하는 정확한 지점입니다. 

 

저는 실제 그런 분을 봤습니다. 고3짜리 수험생 아들을 공부하라며 주일인데도 교회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지옥을 가도 좋으니 우리 아들 무조건 서울대만 합격시켜 달라는 겁니다. 솔직히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왜 그럴까요?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절대가 아니고 외아들이 절대여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유,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귀감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그토록 소중한 외아들이었지만, 막상 하나님이냐 외아들이냐 했을 때 단호하게 하나님을 택했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에게는 끝끝내 하나님이 절대였습니다. 하나님도 시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네 독자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이제야 비로소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이삭도 다시 얻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도 받았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꼭 확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궁극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겁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독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셨다는 거예요.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의 무서운 원칙과 철칙은 바로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절대주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모노 야훼이즘(mono-yahwism)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 제일주의, 모노 야훼이즘이 바로 그로 하여금 여호와 이레의 위대한 축복을 누리게 했다는 겁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올해도 우리가 이 코로나 정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면, 외아들도 지키고 여호와의 이레의 축복도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고 외아들 중심주의, 외아들 제일주의로 살면 결국은 외아들도 잃고 하나님도 여호와 이레의 축복도 다 상실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 이 시련의 와중에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순종합시다. 그리고 시험을 이깁시다. 또 반드시 하나님 절대주의, 모노 야훼이즘으로 삽시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와 미래를 친히 준비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그야말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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