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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우연은 없다
설교본문 빌 1:12-2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8-29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829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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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오늘이 벌써 8월 마지막 주일인데, 저희는 여전히 이렇게 가정에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예배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올 역시도 저희들 <코로나>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새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왔습니다. 

모든게 힘들고 열악한 중에도 주님께 바칠 아름다운 열매를 준비하는 저희들 되도록 성령으로 도우시고 또 깨우쳐 주시옵소서.

 

환자들을 찾아가사 위로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옵소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민하며 고통하며 기도하는 가정들의 안타까움도 헤아리사 응답하시고 그 모든 어려운 형편들을 수습하사 속히 형통케 해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부터 가족들을 보호해주시고, 착실한 백신 접종을 통해 가족 중 그 누구도 확진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지켜주시옵소서.

 

주님, 무엇보다도 저희들 한 주라도 빨리 현장 예배로 복귀하여 교회에서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더욱 자신을 살피며 결단하며 평안을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829m

빌 1:12-21

우연은 없다

 

(빌 1:12-21, 개정)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제가 자주 그랬지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전에는 우연이 없다구요. 모든 게 필연이라구요. 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고, 하나님의 섭리이고, 경륜이라구요. 그건 사실입니다.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것, 주님의 뜻이나 계획이 아닌 것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연이란 무엇일까요? 

 

그 사건, 그 역사에 내재된 하나님의 뜻이나 계시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할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심을 믿는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내 삶이란 주님이 궁극적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필연이다. 내 삶, 내 생에 그 어떤 것도 절대 우연은 없고 오직 필연만 합력하여 마침내는 최종적인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는 믿음, 그것을 우리는 섭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구약에서 섭리 신앙의 대가를 꼽는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요셉이지요. 창세기 45장 3절 이하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그러나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하여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의 온 집에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요셉이 당한 배신과 아픔과 고통보다 더 큰 비애나 불행이 과연 있을까요? 어떻게 친형들이 공모해서 어린 동생을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에 던집니까? 어떻게 자신들의 어린 동생을 돈을 받고 외국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길 수가 있습니까? 만리타향 애굽에 팔려가서는 또 얼마나 모진 고생을 하고 모함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혹독한 고통을 겪습니까? 시편 105편은 당시 요셉의 그 한 많은 옥살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영혼이 쇠사슬에 매었었노라”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원통하고 그 상처가 깊었으면, 그의 영혼이 다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같았으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형들을 저주하며 날마다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가 죽음처럼 아팠지만, 그러나 그 어디에도 형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신세를 한탄하거나 절망한 흔적이 없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기적 같이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어느 날 형들과 정말 외나무다리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십 수년 전 자기를 노예로 판 형들은 지금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까지 온 절대 약자들이고, 그 사이에 요셉은 팔려온 노예의 신분에서 대제국 애굽의 제2인자인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절대 강자로 형들과 맞닥뜨린 겁니다. 

 

형들은 지금 두려워서 사시나무 떨듯 하는데, 요셉은 방성대곡하며 뭐라고 했지요? 당신들이 나를 팔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근으로부터, 이 살인적인 흉년으로부터 우리의 가족들을 지키고 구하시기 위해 당신들 앞서 나를 애굽에 보내신 것이라며, 따라서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고 주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작품이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소서. 나를 버리고 팔았다고 해서 한탄하지 마소서. 이 모든 게 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형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했습니다. 정말 섭리 신앙의 극치 아닙니까? 요셉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극까지도, 인륜을 범한 형들의 범죄까지도 다 심오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절대 형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대단한 섭리 신앙의 선각자고 선구자입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아픔이나 상처도, 배신이나 모함이나 고통도, 무고한 옥살이도 다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경륜으로 해석하고, 인간사 그 어떤 황당한 사건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또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의 뜻 없이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과연 이 세상 그 무엇이 하나님의 경륜 아닌 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연은 없습니다.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도 다 필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꼭 이 요셉 같은 섭리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만 험한 세월도, 이 가혹한 코로나 현실도 다 믿음으로 이기고 오히려 감사하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신약에서 섭리 신앙의 대가를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굴까요? 단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이죠. 잘 아시는 대로 바울 역시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섭리 신앙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처지와 환경과 시련을 정말 무섭도록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의 경륜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수용한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용감했고 담대했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만 해도 이것이 원래 옥중서신 아닙니까? 바울이 63년경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의 주제가 뭐라구요? 빌립보서의 주제는 놀랍게도 기쁨입니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감옥과 기쁨이란 서로 반대말 아닙니까? 서로 상반되는 말 아닙니까? 그럼에도 이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무려 20회 이상 나옵니다. 

 

그것은 대체 뭘까요? 바울의 허세요 허풍입니까? 바울의 과장이고 위선입니까? 아닙니다. 옥중서신 빌립보서의 기쁨이란 바울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요 개가입니다. 바울은 당시 자신의 그 수감 생활을 비극이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필연의 과정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로서는 그저 감사하고, 감옥에서도 절로 기쁨이 우러난다고 진심어린 고백을 한 겁니다. 그것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당시 바울이 자신의 그 처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음에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한번 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내가 당한 일이란 바울 자신이 투옥된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사건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절대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복음사역은 이것으로 끝이다 혹은 안타깝다, 불행하다, 슬프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했죠? 이것이, 이 사건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너희가 꼭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누구나 낙심하고 원망하고 비관하고 초조해하고 절망해야 맞는데 바울은 추호도 그렇게 생각하고나 부정적인 정서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자기가 투옥 당한 사건이 복음전파에 도움이 됐다고 기뻐하며 감사했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여기 나오는 시위대란 로마 황제를 경호하고 왕궁을 지키는 근위대를 말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는 그 시위대원, 파수대원들에게 전도를 해서 이미 그때 시위대원 가운데 몇 사람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그 수감 생활을 로마의 심장부를 복음화 하시려는 주님의 원대한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시 로마 감옥에서 쓴 골로새서 4장을 보면, 바울의 그러한 확신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감옥에 있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인데, 이렇습니다. “나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여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더욱 담대하게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우리 같으면,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혔다면, 성도들에게 어떤 기도를 부탁할까요? 당연히 제발 하루빨리 내가 여기서 나가도록, 석방이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이 그것 말고 뭘 더 바라고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감옥 속에서도 내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게 기도해 달라며, 그것을 위해 내가 이 감옥에 들어왔노라. 그것이 주님의 뜻이요 섭리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확신입니까?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힌 것은 절대 불행한 일도 아니고, 억울한 일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고, 오히려 이 모든 게 복음의 진보를 위한, 복음 전파를 위한 주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섭리 신앙인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당시 바울이 겪었던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도, 해석도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본문 15절 이하를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메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7절에서 바울이 가리킨 그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참 고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금 감옥에 매어있는 바울에게 더 큰 괴로움을 주려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오히려 기뻐하며 보아라, 바울은 범죄자였다며 악선전하고, 바울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하기 위해 전도에 더 많은 열을 올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전히 시기심으로, 너만 전도할 줄 아느냐며 보란 듯이, 시위하듯이 전도를 하고 다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섭섭해 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어째서요?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섭리 신앙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같이 복음을 전하던 동역자들의 배신이나 모함이나 시기심, 질투심까지도 그는 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파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저 감사하고 또 기뻐할 뿐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섭리 신앙입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한번 보십시오. 당시 바울은 일정 기간 수감생활을 마치면 출소하는 그런 일반 재소자가 아니고, 언제 끌려 나가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라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측은하고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십시오. 당시 바울의 정서나 모습에서는 그 어디에도 사형수의 어두운 그늘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죽음의 공포나 초조함이나 두려움이나 체념이나 불안한 기색이 안 보입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끌려 나가 목베임을 당할 사람인데도 전혀 죽음을 의식해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는 대목이 없다는 겁니다. 

 

그건 대체 뭘까요? 어디서 온 초연함일까요? 20절 이하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고 지금도 전과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나로 인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면 그로 족하다는 겁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내 한 목숨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직 주님 뜻대로, 주님의 섭리대로, 주님의 처분대로만 따르고 순종할 따름이라는 겁니다. 말이 그렇지 죽음 앞에서까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요? 

 

한번은 어거스틴이 심한 열병으로 혼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어거스틴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낳고자 하느냐 살고자 하느냐? 어거스틴이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 원대로 마시고, 오직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오직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 다음 순간 눈을 떴는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면서 죽을 수도 있었던 고열에서 놓여닸다고 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백작 한 사람이 자기의 신분과 명예와 지위와 재물을 하루아침에 다 포기하고,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맨발로 거리에 나섰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했고, 그 꼴이 뭐냐고 비난하며 대놓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그는 한 친구에게 아니야 나는 아직도 너무 사치스러워. 나는 아직도 너무 부요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은 내가 주님을 위해 더 고독하게, 더 가난하게, 더 처절하게 죽는 것이라네. 그는 저 유명한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요 섭리 신앙의 대가인 진첸도르프 백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감옥도 동료의 배신도 헐벗음도 굶주림도 죽음도 더 이상 불행이나 슬픔이 아닙니다. 섭리 신앙에 투철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픔도 고통도 더 이상 불행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반드시 그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저 기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살아가며 겪고 당하고 만나는 모든 게 불행이 아니고 우연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필연이고 다 하나님의 뜻이고 경륜이라고 굳게 믿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벌써 2년째 코로나19에 갇혀 숨 쉬는 것도 어렵고, 모든 사회활동, 경제활동에 극심한 제약을 받으며 온갖 고통과 손실을 다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믿읍시다.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그 섭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명쾌하게 다 해석할 수 없어서 그렇지, 분명히 이 사건 배후에도 심오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한, 이 팬데믹 상황도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일 뿐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명쾌하게 이해하고 깊이 깨닫게 하시며, 진심으로 감사하게 하실 줄 믿읍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요셉과 바울의 섭리 신앙이 여러분들께도 늘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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