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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설교본문 수 6:1-9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8-22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822e.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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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주일 아침입니다.

저희들 벌써 6주째 이렇게 비대면 가정예배로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신 대로 오늘도 이 가정과 함께 하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산 제사가 되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또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하신 그대로 오늘 저희가 구하고 기도하는 바도 꼭 응답해주시옵소서.

 

주님,

코로나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확진자도 여전하고 더 강한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도 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상황을 주님이 친히 통제하시고 제어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루 속히 교회도 사회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가사 위로하시며 안수해주시고, 이런저런 아픔으로 고통하며 고뇌하는 가정들을 기억하사 그 사정과 형편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상고할 때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결단하게 하사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822m

 

수 6:1-9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 기억하시죠? 70년대 중반에 나온 하길종 감독의 작품이었는데, 신문에 연재된 최인호 씨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든 청춘 영화였습니다. 하길종 감독도 최인호 씨도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만, 그분들의 작품만은 아직도 우리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70년대는 유신시대였잖아요. 그 암울한 시대의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의 좌절과 패배주의를 아주 감성적으로 풍자한데다, OST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송창식의 고래사냥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죠. 머리를 빡빡 깎은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고 서울역을 막 출발할 때, 플랫폼에 서 있던 영자가 열차를 따라가며 차창에 매달려 키스하는 마지막 장면 기억나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보들의 행진이 무엇인가를 아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손에 무슨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작전을 수립한 것도 아니고, 훈련된 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에 오합지졸인데 그런 민간인들이 감히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겠다며 날마다 그 성을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바보들의 행진입니까. 병태 친구 영철이가 툭하면 예쁜 고래를 잡겠다며 영동선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로 가는 것과 꼭 같지 않습니까. 당신 여리고 성의 파수꾼들이 얼마나 배꼽을 잡았을까요. 

 

애굽을 떠난 지 어언 40년,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며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첫 발을 디뎠는데,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가나안 땅은 결코 그들에게 무위도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는 또 다른 엄청난 도전과 장애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바로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철옹성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결국 그 성채를 함락시킵니다. 우스꽝스러웠던 그 바보들의 행진이 마침내는 천연 요새인 그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거기에 기어이 여호와의 깃발을 꽂아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로 삼게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도 많은 성채들이 버티고 서서 우리를 위협하며 진로를 방해하며 여러 가지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처럼 반드시 저 성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이스라엘은 어떻게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점을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절 하반절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발을 불 것이며.” 여러분, 이것이 당시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여리고 성 정복의 비책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보십시오. 무슨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라거나, 상대 허를 찌르는 기발한 작전을 일러준 게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라는 것이고, 마지막이라 이레째는 일곱 바퀴를 돌라는 게 전부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어떻게 그 거대한 성을 함락시키고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터무니없습니까? 아마 처음 그 말씀을 들은 여호수아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을 겁니다. 또 여호와로부터 그 말씀을 전해 받은 백성들도 너무너무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건 데모하는 것이지,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것이지 전쟁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 하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든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내심 놀라고 이해가 되지 않고 상식적으로도 잘 용납이 안 됐지만, 그래도 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다는 겁니다. 그 누구도 이탈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다 그 바보들의 행진에 참여해서 함께 돌았고 함께 그 말씀대로 실행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언제나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이런 절대적인 복종과 순종이 지금 내 앞에, 우리 앞에 놓인 저 거대한 성채를 정복할 수 있는 절대적인 비결입니다. 무조건 복종하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는 잘 안 됩니다. 우리가 늘 하는 소리가가 뭡니까? 말씀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면 하루도 못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당연시 하고, 대신 자기 고집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대로 사는 삶을 정당화하며 합리화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 따로 우리의 삶 따로 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따로 놉니다. 따로 작동합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삶에서 좀처럼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기적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에 복종합시다. 믿는 사람들은 미각이나 시각이나 후각보다도 청각이 좋아야 합니다.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레 동안 그렇게 여리고 성을 돌라고 하셨을까요? 또 왜 이레째는 한 바퀴가 아니라 무려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의 7은 만수, 완전수 아닙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완전한 복종을 원하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바라시고 기대하십니다. 누구나 하루 이틀은 복종할 수 있습니다. 사흘 나흘은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이 무너진다는 아무런 징후도 아무런 조짐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닷새 엿새를 계속 복종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레째 되는 날 일곱 바퀴를 다 돌기까지 순종한다는 것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적은 반드시 그 마지막 날 마지막 바퀴까지 다 돌아야 비로소 일어납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의 복종의 행진을 지켜보신 후에 마침내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이스라엘이 만약 마지막 날 다섯 바퀴까지만 돌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까요? 여섯 바퀴까지 돌았음에도 여전히 아무런 징후가 안 보인다며 거기서 그만 행진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끝까지 복종합시다.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겨우 며칠만 복종하다 포기하고 용케 마지막 날까지 간 경우에도 마지막 바퀴까지 다 돌지 못하고 세 바퀴 네 바퀴까지만 돌다 그만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올해는 복종의 행진을 결코 멈추지 맙시다. 끝까지 갑시다. 여리고 성은 이레째 여섯 바퀴 반을 돌 때까지만 해도 아직 멀쩡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일곱 바퀴를 다 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고 거기에 여호와의 깃발,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다음은 언약궤를 앞세웠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의 행군 대오를 보면, 맨 앞에는 일곱 제사장이 있어서 양각 나팔을 붑니다. 그다음에는 언약궤가 나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백성들이 따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제일 먼저 언약궤가 강에 들어서고, 그다음에 백성들이 도강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추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내 인생 맨 앞에 모시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할 때도 이스라엘은 늘 그랬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불기둥 구름기둥이 앞서가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먼저고 나는 그 뒤입니다. 항상 주님이 먼저 가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은 늘 나를 따라오라, 나를 따르라 그러셨죠? 그래서 주님의 제자를 독일어로 Nachfolge, 뒤따르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삶에서, 나의 인생 여정에서, 이 광야 행군에서 자꾸만 주님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제치고 내가 앞장서려고 하고, 하나님을 따라가지 않고 자꾸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주님의 양들입니다. 소나 말이 아닙니다. 소나 말은 제 주인 앞에서 가지만, 양은 반드시 목자의 뒤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고 푸른 초장으로 쉴 만한 물가로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소띠어도, 말띠고 원숭이띠라고 해도, 우리는 다 주님의 양들임을 잊지 마시고, 반드시 그리고 끝까지 목자 되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착하고 신실한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도 여리고를 돌 때 그랬습니다. 일곱 제사장이 앞장서서 나팔을 불고, 그다음 여호와의 언약궤가 나가고, 그 뒤를 따라 백성들이 행진했는데, 그런 대오를 끝까지 유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결국은 그 태산 같은 성채를 함락시키고 정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목자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의,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이드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절대 주님의 안내를 사양하며 이 대오에서 이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이고 잘난체하는 것이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길 잃은 양, 잃어버린 양이 될 수밖 없습니다. 진심으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정에 앞에 놓인 저 생채들을 다 허물고,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푸른 초장으로 나가기를 바라신다면, 주님의 뒤를 좇는 일에 좀 더 성실하시고, 좀 더 열심히 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함성을 질렀다는 겁니다. 본문 5절입니다.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들은 다 큰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대목에서 함성을 지르라고 하셨을까요? 마지막 일곱째 날 일곱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그것을 신호로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라. 그러면 이 성벽이 무너져 성채가 함락되리라고 하셨는데,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마지막 순간, 최후의 순간에 온 백성의 믿음을 하나로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 태권도 선수들이 격파할 때 마지막 순간에 기합을 넣잖아요. 자기의 모든 힘을 기합과 함께 한 지점에 모은 겁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굉장한 폭발력, 파괴력이 발생합니다. 그와  꼭 같은 원리입니다. 모든 백성이 큰 함성과 함께 믿음의 기운을 한 곳에 집중하면, 정말 태산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합심 기도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효과를 기대해서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합심해서 기도하면, 무엇이든 다 풀 수도 있고, 묶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한 사람의 믿음은 약하지만 두세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믿음의 기를 한 데 모으면, 거기서 놀라운 영적인 시너지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런지 안 그래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6장 20절입니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이것은 볼록렌즈로 햇볕을 모아 초점을 맞추면 금방 연기가 나고 불이 붙는 원리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요새와 같은 철옹성이라고 해도, 렌즈로 초점을 맞추듯이 백성들이 거기에 모든 믿음을 집중하면 결국 무너지고 만나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태산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크고 작은 성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함성을 지르며 믿음을 하나로 모을 수만 있다면, 사실 무엇이든 정복할 수 있고, 무엇이든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 바늘 하나 가지지 않고도 그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완벽하게 함락시키고 가나안 정복의 탄탄한 베이스캠프를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올해는 우리도 끝까지 주의 말씀에 복종합시다. 그리고 따로 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주님만을 따라갑시다. 또한 함성을 지르며 믿음의 기를 하나로 모읍시다. 그래서 개인적이고 가정적이고 교회적이고 국가적인 모든 성채들, 특히 가장 위협적인 저 코로나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정복해서 다시금 평안을 되찾는 우리 사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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