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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약속의 자녀
설교본문 롬 9:7-2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8-15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815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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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광복절이자 주일인 오늘도 저희들 비대면 가정예배로 하나님을 뵙습니다.

조촐하나마 성령의 역사로 신령과 진정을 다하는 산제사를 드리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났지만 한낮의 무더위는 여전하고, <코로나19> 또한 확진자가 점점 더 늘고 있습니다. 

백신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접종률과는 반대로 가고 있어서 우려가 큽니다.

주께서 이런 저희의 사정을 살피사 친히 이 상황을 통제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 가사 안수해주시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통하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가정들을 위로하사 그 구하는 바를 응답해 주시옵소서.

 

주님, 벌써 오늘이 비대면 가정예배 5주차입니다.

저희로 하여금 하루 속히 일상으로 복귀하여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고통스런 시대, 모쪼록 믿음으로 견디며 이기게 하시고, 기도함으로 주님의 도우심과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 주의 계시를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경험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815m

롬 9:7-21

약속의 자녀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러분, 본문 7절 이하에 나오는 이삭이 누굽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장남입니까? 차남입니까? 독자입니까? 아브라함이 100세 얻은 독자입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그렇게 말씀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역시 창세기 22장 16절 이하입니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히브리서 11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렇다면 이삭이 정말 아브라함의 독자 맞습니까? 이스마엘은 누구입니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비록 첩일망정 하갈에게서 이삭보다 먼저 얻은 아브라함의 자식아닙니까? 당연히 아브라함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만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7절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식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오직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더 가혹합니다. 이삭이 태어나자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아예 집에서 내쫓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로 인하여, 이스마엘로 인하여 매우 근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인데요.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광야로 쫓겨납니다. 그런데 그 배 다른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원조입니다. 이삭의 후손들은 이삭의 야곱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을 국호로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이슬람은 그때 광야로 쫓겨난 후 오늘날까지도 사막지대에서 살며 중동의 강력한 아랍연맹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조상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고 고백하고 있고,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바로 자기들의 뿌리고 원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제기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의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과 이스마엘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어째서 굳이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자식으로 간주하시며 오직 그를 통해서만 당신의 기업을 잇게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첩의 아들이고, 이삭은 정실의 아들이어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삭의 두 아들인 에서와 야곱은 또 무엇입니까? 둘 다 같은 씨, 같은 배, 같은 시간에 나온 쌍둥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첩의 아들이어서 버림을 받았고, 이삭은 본처의 아들이어서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정실의 아들이냐, 첩의 아들이냐가 아니라, 육신의 자녀이냐 약속의 자녀이냐가 그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자녀는 무엇이고, 약속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자녀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식이고,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식을 가리킵니다. 더 어렵습니까?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고, 생일도 같은 쌍둥이인데,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 것은, 야곱은 늘 이뿐 짓만 하고, 에서는 늘 미운 짓만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라구요? 본문 11절 이하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에서와 야곱, 그 두 아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그래서 아직 무슨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인데, 하나님이 벌써 야곱을 택하사 그를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배에서 난 한 형제이고, 한 씨에서 난 쌍둥이라 해서 그 운명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약속의 아들이냐, 그렇지 못한 육신의 아들이냐가 이스마엘과 이삭을 가르고, 에서와 야곱을 가르고, 또 이스라엘과 이슬람을 가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를 결정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어떻게 생각합니까? 야곱은 비록 동생이었지만 무서운 집념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훔치고, 필사적으로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기 때문에 마침내 형 에서를 제치고 하나님의 기업을 쟁취했다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수준을 초급반입니다. 그러면 중등반이나 고급반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집요하고 지독하게 굴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따내고, 차남이 장남이 된 게 아니라, 실은 그 반대라는 겁니다. 야곱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약속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운명적으로 치열하게 살면서 장자의 지위도 빼앗고 기어이 하나님의 축복도 가로챌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어서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예수를 믿고 있고, 비대면 예배로나마 주일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극적으로 회심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상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세우신 게 아니라,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그렇게 강제로 나를 회심시키사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정확하고 완벽한 확신입니까?

 

여러분,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훔친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정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건이고,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깜쪽 같이 당한 사건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속이고 에서에게 주어야 할 축복을 야곱에게 내린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삭이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낳은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의 나이 60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때는 그의 나이 20세 전후, 그러니까 이삭의 나이가 약 80세쯤 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후에도 무려 100년을 더 살아서 18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80세까지 산 사람이 아무리 감각이 무뎌지고 눈이 어두웠다고 해도 그렇지 80세에 벌써 야곱의 그 어설픈 연극에 넘어가서 에서의 몫인 장자의 축복을 실수로 야곱에게 주었다는 말입니까? 말이 됩니까?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염소를 잡아서 그 가죽을 자기 팔과 목에 감았지 않습니까? 에서는 온 몸에 털이 무성한 사람이었고, 야곱을 털이 없는 민둥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소 털로 형을 가장한 건데, 아버지 이삭이 야곱의 팔을 만져보고 뭐라고 했지요? ‘음성은 야곱이로되 팔은 에서로다’라고 하면서 속습니다. 어떻게 염소 털과 사람 털이 같습니까? 또 야곱은 염소 고기를 들에서 사냥해온 고기라며 아버지께 별미를 해드렸습니다. 집돼지와 멧돼지 고기가 같습니까? 닭고기와 꿩고기가 같습니까? 그럼에도 이삭은 어설프게 에서 행세를 한 야곱에게 속습니다. 아니 속아줍니다. 그리고 마음껏 축복해줍니다. 

 

야곱은 지금도 그때 자기가 아버지를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삭이 야곱을 속인 겁니다. 아버지가 고수입니다. 이삭은 이미 야곱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쇼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 당하는 척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약속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기업을 승계할 택함 받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에 승복하며 야곱에게 속아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에 협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더 잘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야곱이어야 한다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에서가 아니라 굳이 야곱이었냐는 겁니다. 어차피 행위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나기 전에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것이라면, 왜 반드시 이삭이고 야곱이냐는 겁니다. 왜 처음부터 이스마엘과 에서는 아니었냐는 것이지요. 

 

솔직히 에서가 야곱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야곱은 늘 부엌에서 팥죽이나 쑤던 사람이었고, 에서는 남자답게 늘 들에 나가 사냥을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팥죽 쑤는 야곱을 더 좋아했고, 아버지 이삭은 사냥하는 에서가 더 남자다워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어째서 그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했냐는 겁니다. 그것이 불가사이하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누구도 풀 수 없는 영적 수수께끼입니다. 영원한 비밀입니다. 오늘이 광복 76주년이 되는 날인데, 저는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일본 사람들은 왜 예수를 안 믿고 온갖 미신과 우상숭배에 절어 살까?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살고, 노벨상 수상자도 더 많고, 더 세련되고 교양도 더 있는데, 하나님은 왜 그 일본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굳이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고집하실까? 그렇다고 잘 믿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사고치고 주님을 욕되게 하고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것이 일인데, 무엇이 이쁘다고 여전히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일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 14절 이하의 말씀이 그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14절 이하입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누구를 긍휼히 여기고,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다 내 뜻이요 내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하고 신성한 주권 행위라는 강변이십니다. 20-21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엿장수가 1분에 가위를 몇 번 치든 그것은 오직 엿장수 마음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무슨 그릇을 만들든 그것은 순전히 토기장이의 마음이고 토기장이의 의지입니다. 따라서 나는 왜 뚝배기로 만들고, 나는 왜 가마에서 꺼내자마자 깨뜨리냐며 항의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마음이고 토기장이의 선택이니까요.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이며,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버리신 것이며, 또한 지질이도 못난 한국 사람들을 택하시고 저 잘난 일본사람들을 버려두신 것도 다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이요 신성불가침의 뜻이요, 그분만의 고유한 주권행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항의나 회의가 아니라 오직 감사할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난 사람을 다 두시고, 굳이 못난 나를 택하신 데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임의대로 이삭은 택하시고 이스마엘은 버리신 겁니다.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서고, 불쌍히 여길 자는 불쌍히 여기신 것뿐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이 토기장이로서의 절대 주권과 선택의 권한을 바르게 이해하셔서 우리의 구원과 역사와 현실의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좀 더 신앙적이고도 성서적으로 잘 이해하시면서 늘 감사하며 사는 약속의 자녀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