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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칼의 악순환
설교본문 눅 22:36-3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3-21

* 설교 영상은 녹화 오류로 제공되지 않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20210321m

눅 22:36-38

칼의 악순환


(눅 22:36-38, 개정)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38]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본문의 무대는 최후 만찬장입니다. 주님이 만찬을 드시며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 이하입니다.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런 후 주님은 가룟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도 하십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또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배신할 것도 말씀합니다. 33절 이하입니다.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런 후 주님이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사실 굉장히 엄숙한 자리에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36절 하반절입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유대인의 겉옷은 개인 재산 제1호입니다. 겉옷은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이불입니다. 유대인의 문화에는 별도의 이불이 없습니다. 6.25 때 사진을 보면 피난민들이 이불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갑니다. 피난길에 나서는 사람들은 이불 보따리는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어디서 자든 이불이 있어야 밤에 얼어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6.25 때도 굶어 죽은 사람보다 얼어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은 밤에는 춥습니다. 밤에는 반드시 겉옷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주변에서 보기 힘들지만, 전에는 급전이 필요하면 전당포에 가서 물품을 많이 맡겼습니다. 옛날 유대 사회도 전당포가 있었습니다. 가장 흔한 담보물이 개인의 겉옷이었습니다. 전당업자가 겉옷을 전당 잡았다면, 저녁에는 반드시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 후 다음 날 다시 전당 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율법 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같은 선지자는 그런 사회를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어쨌든 그만큼 소중한 것이 개인의 겉옷인데, 주님은 그것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 곁에서 지켜줬지만, 이제는 내가 떠나니까 각자 칼을 사서 자기를 지키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내가 떠난 뒤라도 탈레반이나 하마스, 헤즈볼라, IS 같이 무력으로 봉기해서라도 외세인 로마 세력을 몰아내라는 뜻이었습니까? 아무튼 예수님은 이렇게 당부를 하시고 겟세마네로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십니다. 


체포되는 장면을 요한복음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 이하입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대목을 마태복음 26장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51절 이하입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방금 만찬 석상에서는 자신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스승에 대한 충정으로 칼을 뽑아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십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은 칼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하니까 아예 칼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칼 자체를 부정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은 갖되 그것을 칼집에서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십니다. 죄 없는 스승을 지키기 위해 빼든 충정의 칼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무고하고 억울한 자의 실존적 저항까지도 참으라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만은 못 참겠다고 하며 칼을 뽑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래서 주님을 따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제자들마저도 더는 못 따르겠다며 달아났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요한은 달아났다가 양심에 찔려서 돌아온 것입니다. 정당방위는 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고 최소한의 저항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마저도 참으라고 하십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겁니다. 얼마나 가혹합니까. 지금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 원수들 앞에서 내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라는 겁니다. 말이 안 되는데도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감상적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칼집에 도로 칼을 꽂으라는 것은 주님의 생애 그 자체였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더러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는데 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칼의 비극입니다.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만 진정한 칼입니다. 칼이 칼집에서 뽑히면 그것은 흉기로 변합니다. 우리 생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칼은 칼집에 꽂혀 있을 때만 정의와 용기의 상징입니다. 칼을 뽑으면 다시 꽂지 못합니다. 칼에 희생된 사람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칼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심으로써 칼을 쓰기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현 정부에 대해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도 그 부분입니다. 적폐청산도 좋은데 시간의 문제지 권력의 주체가 또 바뀝니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칼의 악순환, 피의 악순환, 보복의 악순환이 벌어질 것입니다. 피는 피를, 이는 이를, 눈은 눈을, 보복은 보복을 부릅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은 전통적으로 복수를 미화하고, 영웅시 합니다. 무협지나 사극이 거의 피비린내 나는 보복극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우리의 현실적 고민이 있습니다. 중무장을 해도 나를 지킬지 모를 상황에서 정당방위 상황에서도 어떻게 칼을 안 빼들고 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 주님을 따른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억울하고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황당한 사건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도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당신 옷을 제비 뽑고 있는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까?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상대방이 칼을 빼든 상황에서는 절대 간단치 않습니다. 상대가 빼든 칼 앞에서 주님은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원수를 응징하겠다며 칼로 맞서다 보면 너도 나도 다 죽지만, 그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내게 궁극적으로 승리를 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툭하면 칼을 뽑아 휘두릅니다. 왜 그럴까요? 칼을 믿고 칼에서 최후의 보장을 찾고 거기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이 툭하면 칼을 뽑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주 칼을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희생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칼을 뽑지 말고 희생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게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 가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부활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그렇게도 무력하고 억울하고 처참하게 십자가를 지셨지만, 결국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이겼습니다. 빌라도도 죽고 로마도 망했지만 주님은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야 합니다. 이는 이, 눈은 눈이라는 보복의 논리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칼과 피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주님이 목숨까지 바치며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신 이 역설의 진리를 우리도 삶에서 실천하고 구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처럼 승리에 이르는 복 있는 인생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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