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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설교본문 마 26:14-2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3-07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307m.mp3

20210307m

마 26:14-25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마 26:14-25, 개정)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가룟 유다를 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기독교 문화를 자랑하는 유럽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작명을 하는데, 유다라는 이름은 안 씁니다. 독일은 법으로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자서전에서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하면서,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메시아를 살해한 패륜 집단이기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야 한다며 유럽인들을 선동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대라는 민족명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그 규모나 세력이 가장 컸기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될 때 북왕국은 이스라엘로, 남왕국은 유다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남왕국의 중심이 유다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주님도 유다 지파 출신입니다. 한 지파의 이름이 유대라는 민족명이 된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뜻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어떤 이름보다 유다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지금도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와는 반대입니다. 가룟 유다 이후의 기독교 문화권은 그 이름을 금기시합니다. 유다는 영원한 반역의 대명사요 배신의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이름 앞의 가룟은 성이 아니고 가룟 지방이라는 뜻입니다. 즉 가룟 지방 출신의 유다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다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 이름 앞에 출신지를 붙여서 사람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째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을까요? 우리는 사람 속을 모릅니다만, 주님은 가룟 유다가 결국 자기를 배신할 줄 아셨을텐데 말입니다. 실은 그래서 일찍부터 가룟 유다에 대한 희안한 해석이 많이 나왔고, 그 가운데 하나가 몇 년 전에 전 세계를 떠들썩 하게 만든 유다복음입니다. 


유다복음은 주후 240-34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입니다. 이것은 위경입니다. 정경을 흉내 낸 복음서라는 겁니다. 그 내용은 주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 덕분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기에 가룟 유다야말로 주님의 구속사역을 가장 잘 도운 위대한 사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되고, 그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통해 가룟 유다를 복권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전투적인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의 책, <신, 만들어진 위험>이란 책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룟 유다야말로 가장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제자로서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한 공로자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역할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구원도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황당한 왜곡입니다. 정말 주님의 구속사역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이 필연적이었다면, 주님이 본문에서 왜 그를 가리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 하였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 없이도 인류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미화하는 해석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적 연민이나 문학적 상상력보다 주님의 평가가 얼마나 냉혹합니까. 


가룟 유다가 미화되고 가장된 유다복음 말고 정경이 그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을까요? 그는 어떤 경로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왜 그가 주님을 배신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학자들은 그가 12제자 가운데 최소 두 사람 정도로 파악되는 열혈당(젤롯당)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력 봉기를 통해 로마를 몰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호전적인 민족주의 집단이 열혈당입니다. 가룟 유다가 바로 거기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처음부터 뜻이 다른 데 있었습니다. 신앙보다는 정치적 야심에 따라 그는 예수를 따랐습니다. 실제 유대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정치적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과거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정치적 메시아관이 팽배했습니다. 고난의 메시아보다는 영광의 메시아가 당시 메시아 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 로마를 몰아내면 누가 과연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싸우고, 제자들의 어머니 중에서는 청탁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나서는 거사보다는 다른 말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보십시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은 이제 곧 봉기한다보다는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룟 유다는 심한 좌절감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속았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그 길로 당장 제사장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그래도 그렇지 예수를 3년간이나 따라다닌 제자가 돈 몇 푼에 스승을 팔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우선 양심이 불량했습니다. 본문 20절 이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인데, 주님이 나를 판다고 하자 제자들이 놀라서 저마다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하는데, 가룟 유다는 떡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그 난처한 순간을 모면하려 합니다. 주님이 그의 속셈을 꿰뚫어보며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판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잽싸게 손을 빼며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묻습니다. 그때는 이미 가룟 유다가 주님 몸값을 받은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그 돈을 만지작거리며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했던 겁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는 돈을 밝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 이하를 보면, 어느 여인이 주님 머리에 향유를 부으니까 제자들이 분개하며 왜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같은 대목에서는 가룟 유다가 왜 그걸 팔아서 300데나리온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느냐고 호되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그가 도적이라고 합니다. 그가 돈궤를 맡고 있었는데 가끔씩 훔쳤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이중적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심지어 세무사 자격증을 가진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돈 관리를 마태가 한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했습니다. 그가 그만큼 남의 신임을 받았다는 얘깁니다. 그가 얼마나 완벽했느냐하면, 주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판다고 했을 때,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가룟 유다가 팔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만큼 은밀하게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 해도 어떻게 3년이나 한 솥밥을 먹은 스승을 단돈 30에 팔 수 있습니까. 은 30이란 30데나리온을 뜻하는데, 그것은 당시 거래되던 노예 한 명의 가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팔아도 너무 헐값에 판 겁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주님을 팔았는데,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어느 여인은 10배인 은 300이 넘는 향유를 주님 머리에 쏟아 붓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러니 가룟 유다가 나서서 흥분할 만 합니다. 목사도 늘 돈이 문젭니다. 숱한 목회자들이 다 돈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정말 돈 앞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결국은 자기가 사랑하던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이것이 치명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고, 아무리 주님을 가까이 모신 제자라 할지라도 죄 안 짓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자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회개하면 누구나, 어떤 죄도 사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해 누구나 새 출발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불행입니다. 실수나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한 번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즉각 회개했지만, 가룟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시침을 떼고 그럴듯한 표정을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겠다는 것은 이미 주님이 아신다는 얘기였음에도,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판다고 하시며 콕 집어 가룟 유다를 특정하셨음에도, 그는 끝내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를 보십시오. 저 멀리서 닭소리가 들립니다. 그순간 오늘밤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나 대성통곡합니다. 베드로는 미물의 닭소리를 듣고도 회개했는데, 가룟 유다는 몇 차례나 주님의 노골적인 지적을 받고도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운명을 가른 분수령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27장에 가면 가룟 유다도 죄를 범했다며 뉘우치고 은 30을 제사장에게 도로 갖다줍니다만,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이 아닙니다. 삶의 전환입니다. 가던 길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으면 과감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심정적 후회나 반성은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쳤다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지 여전히 돼지 우리에서 가슴을 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지만 삶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변화는커녕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에게 좋을 뻔한 사람이입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의 가장 낮은 곳 제9지옥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주님의 12사도 가운데 하나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 지옥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가룟 유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메시지가 되고 깨달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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