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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 제자
설교본문 요 19:25-27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2-28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228m.mp3

20210228m

요 19:25-27

그 제자


(요 19:25-27, 개정)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 제자가 누구일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운명하기 직전에 모친 마리아를 부탁한 제자가 누구입니까? 26절 상반절입니다. “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러니까 27절의 그 제자란 26절에 나오는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입니까? 누구인데 다른 제자는 다 달아나고 없는데 그 사랑하시는 제자만 남아서 주님의 최후를 지키다 주님의 모친까지 모시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최후 만찬 석상을 보겠습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3절을 보면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아예 주님 품에 의지해 누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처럼 식사 때 반듯하게 앉지 않고 비스듬히 누워 먹었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로 그 제자가 주님 품에 의지해 음식을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도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통해 주님께 누가 주님을 팝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 가까이에 있었고, 제자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십자가 곁을 지킨 제자가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쓰면서 자기 이름 대신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호칭을 쓴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 스스로가 붙인 자호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도 호를 많이 썼습니다.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퇴계 이황 등등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래의 자기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것입니다. 부모가 집안 항렬이나 오행 사주를 따져 붙여준 이름이 본명이 있고, 자신을 보다 잘 나타내려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자호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은 다 나오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의 제자는 단 한 번도 안 나옵니다. 대신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그의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만 8번 나옵니다. 


그러면 요한은 본명보다 호를 더 선호했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붙인 칭호가 더 마음에 들고, 자기 정체성을 잘 말해주고, 보다 신앙고백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호 외에도 우리가 붙여준 별명도 있습니다. 사랑의 사도입니다. 요한이 왜 사랑의 사도일까요? 그는 정말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신구약을 통틀어 유일하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정의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요한1서를 보면 두 차례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의 말년에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100세가 다 된 그를 교회 강단 높은 의자에 앉혀 놓으면 늘 꺼져가는 목소리로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얘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 노 사도의 음성에 온 교회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떻게 사랑의 사도가 되었을까요? 무엇보다 그는 먼저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도 보면, 마치 젖먹이가 어미 품에 안기듯 그렇게 누웠다고 합니다. 수제자는 베드로인데 정작 주님 품에 안겨 식사한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그가 쓴 요한1서 4장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은 먼저 주께서 사랑하신 제자였기에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요한도 처음에는 사랑이 많은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호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갈 때, 거기 사람들이 예수를 막아서자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싹 쓸어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랬던 그가 후에는 위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먼저 사랑을 받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배워야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먼저 얻고 누려야 남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 발생하는 사회의 끔찍한 사건의 원인을 끝까지 추적해보면 대개가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니 마음의 정서가 삐뚤어지고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겁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CCM 가사처럼 사람은 사랑을 받고 성장해야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괴물이 되고 사회적 흉기가 됩니다. 저 하늘의 달이나 별을 보십시오. 그 자체가 발광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햇빛을 듬뿍 받아서 그걸 다시 반사함으로써 영롱하게 빛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요한처럼 먼저 주님의 듬뿍 받아야 남에게 반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세례를 필히 받아야 그것을 다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요한처럼 이 시대의 사랑의 사도, 전도사, 화신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뜨겁게 체험하여 우리도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의 사도로 삽시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주님의 사랑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을 갖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주님이 체포되자 이미 예고한 대로 제자들이 다 달아났습니다. 물론 요한도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열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요한이 주님의 십자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치며 주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그가 주님께 입은 은혜가 너무 커서 차마 그 사랑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거기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누구보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여인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그도 지금 십자가 아래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주님이 극적으로 구해준 사람입니다.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겁니다. 그는 주님이 장사된 후에도 안식 후 첫날 새벽 주님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사랑에 대한 채무자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거스틴, 프랜시스 같은 사람도 주님의 큰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살다보니 사랑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도 주님께 사랑의 천문학적인 빚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신 주님의 사랑,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늘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도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살았기에 끝까지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개념을 너무 교리화나 종교화 하지 마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고귀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우리도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갚겠다는 결단으로 삽시다. 그러면 우리도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일찍이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자기도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문 27절을 다시 보십시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신 그때부터 평생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가서 목회할 때도 마리아를 모시고 갔습니다. 지금도 거기에는 요한뿐 아니라 마리아와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이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리아야 말로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사랑하셨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지만 나는 죽어도 그를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내 정서로는 용납 안 되지만 주님이 용서하신 사람이기에 나도 힘껏 용서하며 사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은 죄인, 못난 사람, 가난한 사람, 환자, 창녀, 세리, 과부, 고아들을 용서하고 포용하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먹고 마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요한1서 4장 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명쾌한 정답입니까.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통해 확증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니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그분이 우리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우리도 다 용납하고 사랑합시다. 우리가 요한과 같은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의 사도가 됩시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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