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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쓴물
설교본문 출 15:22-27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2-21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221m.mp3

20210221m

출 15:22-27

쓴물


(출 15:22-27, 개정)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22절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절입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뒤쫓던 애굽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른 게 엊그제였는데, 이번에는 물이 없어 고통을 겪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마라에서 큰 샘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지만 그 물이 소태 같이 썼습니다. 염분이 너무 많아 짜다 못해 사약처럼 물이 쓴 것입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룻기 1장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거기 각주를 보면, 나오미는 기쁨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홍해 도하라는 큰 기적과 구원을 체험하고 나오미의 노래를 불렀는데, 지금은 마라에서 쓴물을 만나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며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었고, 우리의 세상살이입니다. 홍해도 마라도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여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홍해의 감격을 좀 더 누리게 하지 않고 불과 사흘 만에 마라의 쓴물을 만나게 하셨을까요? 오늘날 지구촌도 보십시오. 온 나라들이 코로나19라는 쓰디 쓴물을 만나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재앙이 없습니다. 이 물을 마시고 목숨을 잃은 사람, 파산한 상공인도 많습니다. 항공이나 관광 사업이 붕괴되다 시피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정상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바로 그 기도입니다. 코로나19라는 마라의 쓴물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바람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 마라의 쓴물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고통의 쓴 잔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이에 대해 본문은 우선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합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이 마라에서 쓴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너희가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수장되는 통쾌한 승리뿐만 아니라 마라의 고통에서도 하나님을 따르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극심한 기갈과 인생의 쓴 잔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평안할 때는 모릅니다. 아픔이 오고 쓰디 쓴 고배를 마시면 그때는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일이 잘 풀리고 싸움에서 승리할 때는 다 감사합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흘 길을 가도 물이 없고, 마라에서 겨우 찾은 물마저도 지독한 쓴물이었다고 하면 본색이 드러납니다. 온갖 원망을 다 쏟아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당할 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진정한 민낯입니다. 이스라엘도 보십시오. 24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기서 백성들이 원망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진정한 의미가 하나님의 시험에 있었다면, 당시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낙제했습니다. 여러분, 광야 같은 세상을 살다 마라를 만날 때, 내 인생에 쓴 잔이 다가올 때, 그때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표정관리를 잘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추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있는 대로 나의 불신앙을 폭로하기보다는 끝까지 믿음을 발휘하여 주님처럼 이 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하지만 내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코로나19라는 세계적 대재앙을 통해 우리 모두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이 초유의 혼란 가운데서도 우리가 얼마나 중심을 잘 지키며 신앙적으로 이 위기에 잘 대처해 가는지를 하나님은 지금도 예의주시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험이든 세상의 시험이든 무조건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도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고 더 큰 영광을 누리게 하려고 시험을 하십니다. 누구든 시험에 통과해야 진학도 하고 의사도 되고 판검사도 됩니다. 말단 공무원도 다 시험을 통과해야 채용됩니다. 시험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쉬운 시험은 없습니다. 신앙인도 마라의 쓴물을 다 통과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지금 지구촌은 코로나19라는 하나님의 거대한 시험대에 서 있습니다. 이번에 이 시험을 잘 치르면 개인의 믿음도, 사회도 나라도 성숙하고 그 체질이 나아져서 더 도약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에서 낙제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사정이 어려워질 것이 뻔합니다. 부디 코로나19가 하나님이 지구촌 전체에 던지신 큰 시험임을 잊지 말고 잘 대처합시다. 


다음으로 마라의 쓴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입니다. 26절 하반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치료하는 여호와의 히브리말은 <여호와 라파>입니다. 쓴물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해서 모세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것을 쓴물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쓴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2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사건을 통해 당신이 치료하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확인시키셨습니다. 쓴물을 단물로, 맹물을 포도주로, 기갈을 해갈로, 괴로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고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병든 우리의 육체도, 우리의 황폐한 정신과 영혼도, 우리의 비뚤어진 인격과 정서도, 우리의 열악한 환경도 다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뜻에서 <여호와 라파>, 고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처방으로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셨습니까? 2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한 나무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특정하고 지정하신 한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한 나무는 주님이 달린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여호와 라파의 처방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한 나무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린 배경을 보면 당시 십자가 주위에 온통 마리아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태복음 27장 55절 이하입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여러분, 마리아라는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대단히 우아하고 고상할 것 같지만 뜻밖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마라입니다. 마라의 파생어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어원이 마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뜻도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마리아, 즉 마라 한복판에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계시적입니까? 그야말로 모세가 마라의 쓴물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지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물에 던져진 한 나무야 말로 주님 십자가의 모형이자 예시고 계시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쓴물을 만나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처방입니다. 지금도 여호와 라파는 하나님이 가리킨 한 나무인 십자가를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의 상처와 아픔도, 이 지구촌의 위기와 절망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수습되리라 믿습니다. 부디 사순절에 더욱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깊이 묵상하여 고치시고 살리는 여호와 라파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합시다. 


또한 마라는 언제나 엘림으로 가는 과정이요 통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라의 쓴물 없는 에림의 오아시스는 없습니다.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죽음의 쓴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골고다 없이 부활의 새 아침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쓴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더 큰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입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 마라에서 쓴물을 마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이 엘림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마라의 쓴물이 엘림의 오아이스로 가는 축복의 통로라고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전에 큰 시험을 당해 고통당하는 어느 집사님을 찾아가서 이 모든 것이 더 큰 기쁨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고 했더니, 그분이 발끈하며 무슨 이런 사랑이 다 있습니까? 라고 반응했습니다. 안 믿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라의 쓴물 후에 엘림의 오아시스가 있음을 믿으면, 반드시 파라다이스를 만납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불과 10km 지점, 약 2시간 거리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시원한 종려나무 그늘 아래 장막을 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엘림은 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마라의 쓴물이 다 인 줄 알고 울며불며 체념합니다. 이게 다 마라를 축복의 통로로 볼 줄 아는 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라는 엘림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실상 쓴물은 단물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라에서 쓴 잔을 마셔 본 사람이 인생을 제대로 아는데, 마라 때문에 엘림이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데 우리는 늘 이 사실을 놓칩니다. 마라의 쓴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우리 인생에 마라가 다가왔다는 것은 이제 곧 엘림이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도리어 기뻐하고 안도합시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바라고 기대하십니다. 올해는 누구나 마라 구간을 잘 통과하여 엘림이라는 파라다이스에 장막을 치는 큰 은혜와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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