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설교제목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설교본문 요 4:23-2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2-07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10207m.mp3

20210207m

요 4:23-24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요 4:23-24, 개정)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코로나로 많은 것이 변하고 흔들렸습니다. 우리의 일상과 대중문화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교회도 예배 풍경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이 지난 해 8월부터 연말까지 14개 국의 성인 14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의 17프로가 코로나로 인해 자신의 신앙심이 약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14개 국 중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반면에 코로나19로 신앙심이 더 강해졌다고 한 경우는 미국이 28프로로 가장 높습니다. 우리나라는 4프로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피해 가운데서 적어도 신앙적인 피해 만큼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것이 이번 통계로 확인된 셈입니다. 

 

이 결과에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은 코로나19로 신앙이 약해졌습니까? 17프로에 속하십니까? 4프로에 속합니까? 제가 볼 때는 개인의 신앙도 많이 흔들렸지만 교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도 우리나라가 가장 많이 추락했다고 봅니다. 교회와 선교 단체, 각종 집회 등에서 확진자들이 나오면서 한국 기독교가 코로나19의 온상처럼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혐오하는 사람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지난 달 29일에 발표된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76프로가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대놓고 개신교가 민폐다, 교회가 지긋지긋하다고 합니다. 

 

하기야 신자조차도 자긍심보다는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이 강한데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지금도 주일 성수나 예배가 기쁘고 감사하고 기다려지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숙제나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시험이 들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가정예배가 드릴 때가 훨씬 좋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런 한계와 모순을 조금씩이라도 극복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진심으로 우리의 예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자세를 제고하면 지금 우리의 혼란이나 갈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배문제, 제사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잘 생긴 사람, 키 큰 사람, 부자, 높은 지위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을 찾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얘기는 하나님이 관심하는 사람, 주목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최우선으로 찾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예배를 하찮게 생각하고 과소평가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그 어떤 이보다 먼저 챙깁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와 하나님이 잘 맞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예배라는 종교의식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시거나 무조건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형식이라기보다는 임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중심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 형식이나 순서, 헌금을 받는 게 아니라 거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와 중심, 그 순서와 예물에 담긴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받으십니다. 

 

시편 40편 6절 이하입니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나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를 바치지 않는 제사나 예배는 한낱 종교의식이나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의식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어째서 예배가 나를 제물로 바치는 최고의 신앙행위가 될까요? 우선 평소에는 몰라도 주일날 예배드릴 때만큼은 내가 하나님을 향해 서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배드리는 순간만큼은 그래도 내 심령이 최대한 하나님 가까이 나아갑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주일에 교회로 나오며 하나님을 뵈러 간다고 생각합니다. 찬송도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찬송을 부릅니다. 기도도 비록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지만 어쨌든 하나님께 바칩니다. 독백이나 옆 사람 들으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설교의 원칙도 마찬가집니다. 저 설교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듣습니다. 주일 성수라는 것도 내가 엿새 동안은 온갖 사람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아귀다툼하듯 세속적으로 살지만 그래도 주일만큼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면전에서 예배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주일 성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그게 아무리 형식적이고 건성이라 해도 예배나 주일 성수는 이미 다른 어떤 행위보다 그만큼 소중하고 복됩니다. 예배나 주일 성수는 이미 그 명분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기에 대단히 의미 있고 값집니다. 하물며 형식이나 의식을 넘어 그야말로 나를 드리는 산 제사야 어떻겠습니까? 그런 예배가 복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런 예배가 우리와 교회를 새롭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왕 노릇보다 먼저 하나님께 일천 번제부터 드렸습니다. 그것은 왕의 권력과 지위보다 제사가 먼저라는 뜻ㅇ비니다. 노아도 601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거처를 옮길 때마다 맨 먼저 한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우리 삶의 최우선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일단은 예배하는 자부터 챙기시며 찾으십니다. 우리가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것은 내 생애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가장 먼저고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내 생활에서 예배가 제1순위임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런 자세로 살겠다는 결단이고 다짐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반드시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를 가장 먼저 찾으시는 이유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기에 보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4절 이하입니다.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바로 그때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배를 자기 삶의 제1순위로 삼으면 하나님도 그 사람의 기도를 제1순위로 들어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학개 1장 6절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왜 이렇게 헛고생하는 일이 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예배를 팽개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우선은 자기가 살 집을 짓고 가족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성전을 멀리하고 예배를 등한시 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주일날도 가게를 열면 가게를 닫는 것보다 수입이 더 늡니다만, 그것은 뚫린 전대에 돈을 넣는 행위와 같습니다. 믿는 사람이 예배에 불성실하면서 복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우선으로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와 방식으로 예배해야 할까요? 본문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성경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의 의미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 희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제사이고, 제사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입니다. 예배도 희생제물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제사입니다. 구약 제사법을 보면 희생제물 없는 제사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는 의식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나, 먼저는 나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내 시간, 내 소득, 내 중심, 내 온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를 희생하는 것이 제사요 예배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려 해도 뭔가를 희생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을 보십시오.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예배했습니까? 먼 길을 오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고, 모험을 바쳤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쳤습니다. 이런 것이 신령과 진정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렇듯 예배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이기에 희생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의식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준은 그게 무엇이든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예배생활의 가이드 라인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 기대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인데 우리는 희생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과 거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자선이나 적선이지 희생 제물은 아닙니다. 말라기 1장 8절 이하입니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지금 한국 교회가 당하고 있는 문제의 8할은 목회자들의 소양과 양식의 문제일 것입니다. 대부분이 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앞으로는 똑똑하고 공부 잘 하고 키 큰 자녀들을 목회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 수준도 올라갑니다. 그래야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덜 다칩니다. 그래야 욕도 덜 먹습니다. 좀 더 희생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희생의 제물을 바치며 신앙생활 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입니다. 

 

금주가 설 주간입니다. 죽은 조상에게 죽은 제물을 바치며 죽은 제사를 하지 말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산 제물을 바치며 산 제사를 드립시다.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