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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염려하지 말라!
설교본문 마 6:25-3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1-17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117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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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공동 기도문

 

주님, 새해 1월 셋째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정에서 주일예배를 드리오니 저희와 함께 하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산제사가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세상은 지금도 <코로나>로 불안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든 게 멈춘 상태입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하루 속히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모든 사회 분야가 정상을 되찾고 또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 모두가 기대하는 백신 접종도 제 때 잘 이루어져서 집단 면역에 차질이 발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현재 교회와 선교단체 감염자들이 많이 발생해 곤혹스럽습니다. 

교회들이 방역에 솔선하고 힘껏 협조해 더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깨우쳐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 가사 위로하시며 안수해 주시고, 가정예배 마저도 여의치 않은 성도들을 기억하사 그 사정과 형편을 헤아리시며 언제 어디서나 주일을 성수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20210117m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2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세상에서 이보다 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 또 있을까요? <그래도 염려가 되느냐? 그럼, 저 공중의 새를 봐라! 저 들의 백합을 봐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은행에 저축하지도 않고, 영끌해서 갭 투자를 하거나 주식을 사지도 않지만, 굶지 않고 헐벗지 않고 건강하게 아름답게 살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도 아무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치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엄마의 따뜻한 자장가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은혜를 받다가도 꼭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꽃이나 새처럼 염려를 안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며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 인생을 책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내일 일을 염려라지 말라>니... 그럼, 내일을 위한 준비나 설계 같은 것도 다 필요 없단 말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염려를 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삶의 온갖 모순이나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해소돼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의문이 안 생기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저나 여러분이 아무리 그렇게 염려의 불가피성을 역설한다고 해도 주님은 여전히 염려란 전혀 무익한 것이고,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은 먼저 <염려>의 비생산성을 지적하십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좋은 얘기, 건전한 얘기를 다 두시고 키 얘기부터 하는 게 제게는 그리 마음에 안 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사정일 뿐 말씀은 맞잖아요? 염려한다고 키가 큽니까?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비해 키가 작았습니다. 

우리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에 비해 평균 신장이 떨어지듯 유대인들도 늘 그런 신장의 열세에서 오는 신체적인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한들 작은 키가 더 커지겠습니까?

제가 늘 그랬잖습니까? 염려하고 고민해서 키가 큰다면 저는 벌써 NBA에 가서 조던이나 스테판 커리랑 놀았지, 덩크슛하고 있지 여기 있지 않았을 거라구요! 따라서 염려란 백해무익이라는 겁니다. 

 

또한 주님은 <염려>를 비신앙적이라고 하셨습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여러분, 어린아이들은 왜 염려를 안 할까요? 엄마 아빠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무엇이든 다 해결하고 다 책임진다고 철석 같이 믿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만 곁에 있으면 전쟁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이들은 여전히 깔깔대며 장난치고 놉니다.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신 것도 무슨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라, 순수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이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듯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 복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엄마 아빠를 곁에 두고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염려>라는 게 전적으로 믿음의 문제고, 또 불신앙의 소치라는 게 주님의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결국은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시며 책망하신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과연 이 비생산적이고 비신앙적인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선

1. 내 삶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왜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을까요? 

 무슨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날아가는 새의 깃털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 요절이라도 적혀 있어서 그걸 보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의 근거, 생존의 원리를 보라는 겁니다. 

 

여러분, 공중의 새가 거저 저렇게 날아가는 줄 아십니까? 저 들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가 제 힘으로 저렇게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요! 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도, 거두지도, 길쌈도 하지 않고, 곳간도, 은행 통장도, 주식 한 닢도 없지만 밤낮 염려하며 고뇌하며 영끌로, 동학개미로 갭 투자하고, 주식 투자하는 우리 인생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한두 푼에 팔리는 저 미물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저렇듯 완벽하게 먹이시고 돌보시는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저렇게 아름답고 건강하게 입히시고 키우시는데 하물며 너희겠느냐? 저런 자연물보다 훨씬 더 귀한 너희들이야 오죽 더 잘 돌보시고, 더 잘 입히시고, 더 잘 먹이시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지 않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신 겁니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보지 말고, 깊이 새겨 보며 그 사실을 깨달으라는 겁니다. 

 

특히 여기 나오는 <공중의 새>란 무슨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큰 새가 아닙니다. 주님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바로 그 <참새>를 말하는데, 사실은 그 <참새>도 번역상 <참새>라고 한 것뿐이고, 원어상으로는 그냥 작은 새입니다. 참새보다 더 작은 딱새, 박새, 곤줄박이, 오목눈이 같은 새를 말합니다. 

 

여러분, 반 푼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데 뭘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십니까? 

제가 늘 말씀 드렸잖습니까?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창조주>고 <조물주>일 뿐이라구요! 하나님께도 그것들은 다 그냥 <창조물>이고 <피조물>이고 <자연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만 당신의 형상, 당신의 분신들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를 닮듯이 우리는 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진정한 아버지십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염려하시고 걱정하십니까? 

엄연히 아버지가 계시고, 그분이 내 머리터럭 한 올까지 다 세고 계시고, 또 많은 새보다, 저 들의 백합화보다 나를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신다는 데 왜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하시며 노심초사하십니까? 

 

결국은 우리가 아직도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내 재주로, 내 노력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제는 좀 하나님 아버지가 내 운명의 절대적 주권자라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게 무엇이든 절대 내가 애쓰고, 내가 고민하고, 내가 염려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읍시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주님 발 앞에,  십자가 아래 내려놓읍시다. 

 

그래야 삽니다. 그렇게 해야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이 모든 염려와 걱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해방됩니다. 

 

2. 다음은 내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에게는 절대 의식주가 먼저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면 아마 당장 <아니,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가 최우선이 아니면 뭐가 먼저란 말인가?>하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즉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더 하시리라>

 

그럼에도 문제가 뭡니까? 주님은 분명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의 제1순위라고 하시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의식주>가 먼저라고 우긴다는 거지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의 의냐?>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빨리 재난지원금이라도 받았으면 하는 마당에 무슨 <의식주>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이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맞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분명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먼저입니다. <코로나19>가 아니라 이보다 더한 상황이 온다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의식주>를 우선시하고 밤낮 <의식주> 문제에 붙잡혀 살기 때문에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본문 32절에서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러분, 분명한 것은 <의식주>를 자기 삶의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거나 자기 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다 이방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의 삶의 전형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들은 오직 의식주 밖에는 없잖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게 전부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고, <하나님의 의>가 우선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공급해주시므로 아무런 염려 없이, 걱정 없이 살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수순이고 염려 없이, 걱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음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원래 기독교적인 삶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가 아닙니까? 우리는 원래 하루 단위로 사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을 보십시오. 오직 일용할 양식으로 살잖습니까? 그들에게는 곳간이나 창고가 없습니다. 통장도 없습니다. 그냥 그날그날 주시는 양식으로 살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늘 그날그날 주시는 하루 분의 만나로 살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백성들이 욕심을 부려 많이 거둬서 먹고 남으면 당장 거기에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절대 일용할 양식만으로는 못살지요. 

창고에, 곳간에 잔뜩 쌓아둬야 비로소 안도합니다. 

사실 우리는 다 탐욕의 화신들입니다. 누구도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고민하고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다 내 탐욕이 충족되지 않아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들 잔뜩 쌓아두고도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합니다. 하여간 욕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왜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십니까? 혹 그런 걸로 하나님께 잘 보여 여러분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은 아닙니까? 

원래 불교나 법정 스님, 혜민 스님만 무소유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도 처음부터 무소유와 청빈을 가장 아름다운 덕목 가운데 하나로 여겨왔습니다. 이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도,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어거스틴도, 프랜시스 같은 수많은 중세의 수도사들, 성자들이 다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날아가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 만 인자는 머리 하나 둘 곳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요즘은 어림도 없습니다. 이제는 가난이 가장 큰 불행이고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가난하게 살라고 했다가는 아마 다 달아날 겁니다. 인간의 탐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염려란 우리가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만 탐욕을 부리고 탐심을 발동하는 데서 옵니다. 따라서 염려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면 욕심에 쩔은 지금의 내 마음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디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사십시오. 

주님이 어느 부자에게 하신 말씀 기억 안 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을 텐데 그러면 네가 쌓아 놓은 저 많은 재물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제발 지금 가지신 것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올해는 이 최악의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염려>나 <걱정>이 아니라 <자족>과 <감사>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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