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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연초부터 연말까지
설교본문 사 46:3-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1-01-10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10110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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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오늘도 가정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고 하셨사오니 이 주일 아침 저희와 함께 하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해가 바뀌었사오나 세상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습니다. 

<코로나19>의 위협도, 사회적 거리두기며 자녀들의 학업, 직장생활의 제약과 불편도 여전하여 다들 많이 지쳐 있사오니 부디 하루 속히 이 감염병을 극복하고 모두가 평온과 질서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혼란한 중에도 희망을 보게 하시고, 뭔가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 마음에 큰 확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 가사 주님의 그 뜨거운 손으로 안수해 주시고, 가정예배 조차 쉽지 않은 성도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사 위로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해 주님의 육성을 듣게 하시고, 중심을 바치며 진솔하게 기도할 때 주님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찾아 하늘의 만복을 허락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10110m

연초에서 연말까지

사 46:3-5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여러분, 여기 3절에서 하나님이 <집이여!>, <남은 자여!> 또 <너희여!>라고 하셨는데, 이게 다 누구를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누구를 향해 <야곱의 집이여, 남은 모든 자여, 내게 업힌 너희여!>하고 부르시며 <내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겁니까? 


물론 이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이었지만, 이 시대는 당연히 오늘 우리들이지요. 오늘 우리들의 집, 우리 소수 남은 자들, 우리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하신 겁니다. 


또 3절을 보면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또 <태에서 남으로부터>라는 말씀이 있고, 4절에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또 <백발이 되기까지>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은 하나님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연초로부터 연말까지> 내가 너의 집이며 너의 삶과 신변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 하나만 잘 붙잡고 살아도, 최소한 주님의 이 약속 하나만 놓치지 않고 마음에 잘 담고 가도 절대 망하거나 버림받을 일이 없다는 겁니다. 


자, 그럼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에 남은 자여!> <내게 업힌 너희여!>하며 <들으라!>고 하신 말씀을 한 번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먼저 뭐라고 하셨습니까?


1. 3절을 보면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를 안고 가겠다> <내가 너를 가슴에 품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우리를 보듬어 주시겠다, 사랑하시겠다는 다짐이십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네 집을 따뜻한 품에 안고 가마! 올해도 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너를 사랑으로 보듬고 가마> 그런 약속입니다. 


찬송가 393장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 같네>. 요 13:1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슴에 고이 안고, 사랑으로 고이 품고 연말까지 무덤까지 가실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주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요. 

지금도 아마 그런 분이 계실 겁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많이 사랑해 주셨는데 요즘은 별로라는 겁니다. 개 중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자기를 버리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겁니다. 내 감정, 내 사랑이 식은 겁니다. 내 믿음이 추락하고, 내가 초심을 버린 겁니다. 저 율동공원 연못에 보름달이 훤히 비칠 때 수면에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져 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당장 파문이 일어 연못에 떠 있던 달이 산산 조각납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어떻습니까? 여전히 밝고 커다란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아니라 언제나 내 믿음이 흔들리고, 내 마음에 회의가 일어 주님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실종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랑의 품에 안고 가십니다. 

우리는 교활해서 자주 주님께 책임을 떠넘기기도 하고, 다 지가 잘못해놓고도 주님을 탓하며 원망하기도 하지요. 

<저를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런 짓을 못하도록 왜 사전에  단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 로또라도 당첨되게 해주시면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해서 교회에도 도움이 되고 저도 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왜 안 도와주십니까? 기도하고 사는데도 왜 매번 꽝입니까?>


그렇게 터무니없는 원망을 하며 하나님을 탓해도 주님은 절대 <니가 틀렸다!>고 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품에서 내치시지 않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고 가십니다. 괜히 우리가 제 바람에 회의에도 빠지고, 낙심도 하고, 원망도 하며 시험에 드는 거지 절대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나를 당신의 품에서, 사랑의 품에서 내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올해도 변함없이 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또 태에서부터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반드시 우리를 안고 가시고, 사랑으로 품고 가십니다.


2. 다음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3절 하반절에서는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혔다>고 했고, 4절에서는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업혔다> 혹은 <업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내가 너를 평생 도와주겠다, 안전하게 보호해주겠다, 평안하게 인도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육아 방식이나 문화가 크게 달라졌습니다만, 전에는 우리가 다 할머니 엄마 누나 언니 등에 업혀서 자랐습니다. 울다가도 등에 업히면 그치고, 또 업히면 따뜻하고 아늑하고 편안해서 곧 잘 잤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평생 당신의 등에 업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꽁트 아시지요? 

어느 해변에 <주님과 나> 두 사람의 발자국이 길게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때는 내가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을 때였고, 또 사업에 실패해서 몹시 괴로워하며 힘들어 했을 때였고, 또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크게 슬퍼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도우심과 위로와 격려가 가장 절실했던 순간마다 주님이 내 곁에 안 계셨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주님을 원망하며 항의하잖습니까. <왜 제가 가장 힘들고 외롭고 아플 때 주님은 제 곁을 떠나셨습니까? 왜 주님이 가장 필요할 때 저만 홀로 두셨습니까?> 


주님이 뭐라고 하셨다구요? <얘야,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단다. 저기 모래 위에 찍힌 한 사람의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나의 발자국이란다. 저 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 하고, 너무 아파하고,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해서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단다>


우리는 늘 혼자서 난리입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삐쳤다, 원망했다, 달아났다 하며 온갖 변덕을 다 부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를 품에 안고, 혹은 등에 업고 묵묵히 가십니다. 내가 때로 팥죽 한 그릇에 허무하게 내 영혼을 팔고,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내 믿음을 팔 때도 주님은 절대 나를 팔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업고 가십니다. 


오죽하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하셨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너를 꽉 움켜쥐고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 놓치지 않겠다, 내 등에서 너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천사를 부러워합니다. 왜요? 우리는 없지만 천사에게는 날개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연이지 천사가 주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을 말하면 천사들은 엑스트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업어 키우시지만, 천사들은 절대 업어주시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다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도리어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말씀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비록 날개는 없지만 지위나 신분으로 말하면 우리의 위상이 훨씬 더 높습니다. 심지어 고전 6:3은 <장차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천사들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는 천사들보다도 우리가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천사들은 안 업어주셔도 우리는 반드시 업고 끝까지 가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셨지요? 바울이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동시대를 살았지만 주님과 바울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바울이 회심하기 전 유대교 전사 시절 스데반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을 다 자기를 핍박하고 박해한 것으로 간주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은 항상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자신과 지금 당신이 업고 있는 우리를 하나로, 동일체로 여기시면서 우리가 당하는 핍박이며 모든 박해와 아픔을 다 당신이 대신 당해주십니다. 우리는 그걸 내가 다 당한다고 생각하며 억울해 하고, 때로 비명도 지르지만 실은 내 대신, 우리 대신, 주님이 다 당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주리시기도 하고, 목마르시기도 하고, 주님이 내 대신 신용불량자가 되셔서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당하시기도 하십니다. 언제까지요? 올해는 물론이고 내가 <무덤에 갈 때까지>, 내가 <백발이 될 때가지> 평생 그렇게 나의 모든 걸 대신하시며 당신 등에 나를 업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3. 다음은 4절 하반절, <구하여 내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의 구원을 보장하겠다,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십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구원이 자꾸만 흔들릴까요? 왜 어떤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다가도 또 어떤 때는 전혀 아닌 것 같을까요? 


우리는 언제나 나의 구원의 근거를 알량한 <내 믿음>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믿음, 믿음>하지만 정말 못 믿을 게 바로 우리의 <믿음>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불안정하고, 얼마나 간사하고, 얼마나 변덕이 줄 끓듯 하는 게 우리의 믿음입니까? 기분 따라, 감정 따라, 날씨 따라 춤추는 게 우리의 믿음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그런 내 믿음에서 찾는 한 우리의 구원은 언제나 그렇게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믿을 때는 확신이 오다가도 다시 침체되고 식으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택함 받지 못한 것 같아 비참한 느낌마저도 듭니다. 


그러나 구원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내 믿음에 따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끝없이 불안정한 나의 믿음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된 것이고, 태에서 노년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올해도 이 연초부터 연말까지 우리를 안고, 업고 가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사랑에 근거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여인이 혹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겠습니까? 오죽하면 <칼도 사망도 천사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절대 끊을 수 없다>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내가 주님을 붙잡고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놓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때로 잡고 가던 주님의 손을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나를 안고 업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여전히 안전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아무리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 다시 그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칩니다. 개신교에서도 알미니안 즉, 웨슬레파인 감리교나 오순절 계통인 순복음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다시 버림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 교회, 칼빈주의, 장로교 전통에서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죄도 주님보다 더 크거나 더 쎌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이 이룩하신, 주님의 작품인 구원을 해소하거나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늘 이렇게 못나게 구니까 주님이 나를 미워하셔서 이제 내 구원을 철회하시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은 참 못난 짓이고 전혀 장로교인 답지 못한 발상이라는 겁니다. 


요한일서 2:1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무슨 뜻일까요?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때마다 주님이 하나님 앞에 나서서 <하나님, 그래서 제가 대신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미 십자가에서 저 죗값을 다 치루지 않았습니까?> 하시며 우리를 적극 두둔하시고 변호하신다는 겁니다. 


롬 8:34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게 예측 불가능하고 다 불안정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오직 하나 분명한 게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코로나>로 이 세상이 다 뒤집힌다 해도 그거 하나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하여 내리라!> 이게 바로 내 구원에 대한 주님의 신실한 약속이요 절대적 보장입니다. 


부디 이 최악의 공포의 시대를 주님의 이 <사랑>과 <보호>와 <구원>의 약속으로 끝까지 잘 견디시고, 잘 이기시는 복된 성도들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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