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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믿음의 전당
설교본문 히 11:23-29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10-11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1011m.mp3

20201011m

히 11:23-29

믿음의 전당


(히 11:23-29, 개정)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브리서 11장은 그야말로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등재된 명실상부한 명예의 전당이자 유수한 믿음의 전당입니다. 1-2절에는 믿음에 관한 규정이 나오고, 3절부터는 거의 매절마다 <믿음으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다 믿음으로 살고 승리한 기라성 같은 선각들이 여기에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이야말로 믿음의 전당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 누구보다 영웅적이고 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불가사의한 기적의 연속입니다. 출생부터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유대인들이 규모가 커지자 바로가 유대인 남자 아기는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극적으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공주의 아들로 입양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궁중에서 성장하고 애굽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후 모세가 호렙산 가시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소명을 받는 장면도 신비 그 자체입니다. 출애굽 또한 가히 한 편의 위대한 드라마입니다. 홍해를 가르거나 바위에서 물이 분수처럼 샘솟게 한 것도 극적입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홀로 죽음을 맞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하나님이 숨기십니다. 그의 시신을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죽음마저도 신비에 쌓여 있습니다. 


물론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턱에서 고독사 했기에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한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팡이로 백성들 앞에서 반석을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불같이 혈기를 부리며 두 번이나 반석을 후려칩니다. 사실상 이것은 피상적 이유입니다. 깊은 사연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상징합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토라(율법서)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모세 5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모세고, 모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므리바 사건이라는 표면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가 곧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이 말씀하는 복음적 메시지는 율법으로는 천국가지 못 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므리바 사건을 핑계로 모세의 최후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모세가 실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3자 회담을 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세가 비록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천국에 갔음을 확증하는 증거입니다. 


율법으로는 갈 수 없는 천국을 율법의 상징인 모세가 어떻게 들어갔을까요? 모세조차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매절마다 <믿음으로>를 강조합니다. 모세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천국에 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화신인 모세조차도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본문이 증거하는 모세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온전히 애굽을 떠났습니다. 27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이 말씀은 비록 짤막한 언급이지만 모세의 위대한 믿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믿음의 첫 걸음은 애굽을 떠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애굽에는 모든 보화와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단호하게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25절 이하입니다.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러분, 모세가 예수님을 알았을까요? 모세는 3,500년 전 사람이고, 주님으로부터도 1,500년 전 사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주님을 알고 그분을 위해 수모를 당했고, 이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을 리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고난과 수모를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생과 수모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한 불이익, 고생, 고난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리스도보다 1,500년 이전의 사람인 모세의 불이익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하나님이 접수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희생과 아픔과 고난에 상당한 보상을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렇게 보상해주시는 은혜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초개처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고 기꺼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24절 이하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러니까 세상 낙의 본질은 죄악의 낙이고, 잠시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기를 결단했습니다. 


여러분, 애굽의 낙이 아무리 달콤하고 현란해도 그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영광은 영원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 사실을 알았고 굳게 믿었기에 애굽이 주는 세상의 낙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26절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그 반대입니다. 잠시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기꺼이 버립니다. 여러분, 잠시 누릴 죄악의 낙과 영원한 하나님의 낙을 바꾸지 맙시다. 미련 없이 우리도 애굽을 떠납시다. 더는 애굽의 현란한 불빛에 미혹되지 맙시다. 


다음으로 모세는 <믿음으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27절입니다.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당시 모세가 절대 권력인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 본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앞에 현존하시듯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두려워하고 마귀를 두려워할까요? 우리가 세상과 사람, 돈, 권력을 바라보고 사느라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 왕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대적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보며 살면, 절대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2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모세는 홍해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적인 위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서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외칩니다. 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 역시도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코앞에 닥친 바로의 전차군단을 보고, 삼킬 듯이 위협하는 검푸른 홍해의 성난 파도를 바라보았다면, 그도 별 수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봅시다. 그래야 홍해가 갈라지고, 바로의 군대가 거기에 수장됩니다.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 두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의 파국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 같이 믿고 바라보았다는 모세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모세는 어린 양의 피를 믿었습니다. 28절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행한 10번째 재장은 애굽의 장자가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짐승 뿐 아니라 바로의 장자까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사전에 하나님이 일러주신 처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그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은 넘어간다(유월)는 것입니다. 당시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비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했을 때 어떤 이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양의 피를 바른다고 사람이 안 죽고, 안 발랐다고 죽는다는 건 미신이라는 반응 말입니다. 정말 그랬다면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도 아침에 그의 장자는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양 예수의 피가 죽음의 사자로부터 지켜주십니다. 그가 또한 그 집이 착하냐 악하냐는 상관없습니다. 그가 애굽 사람이냐 이스라엘 사람이냐도 상관없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삶과 죽음을 갈라놓았습니다. 특히 28절에서 <피 뿌림>이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피 뿌림은 피 흘림과 다릅니다. 주님이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안 됩니다. 그 피를 가져다가 우리 집 문 인방과 설주에 발라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그 피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합니다. 주님이 보혈의 피를 흘리셨지만 그 피를 우리 집 문 인방에 바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골고다에서 보혈을 흘리셨다는 사실을 내가 주체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어린 양의 보혈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깊은 확신을 갖고서 어린 양의 피를 역사적 팩트로만 남겨두지 말고, 각자가 문 인방과 이마에 칠해서 믿음의 전당에 등재된 위대한 선진들처럼 그야말로 영원히 죽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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