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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다시, <야곱>을 소환하다!
설교본문 창 25:27-3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8-30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83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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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오늘이 벌써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2월부터 <코로나19>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어느새 봄, 여름이 가고 가을을 맞았습니다. 저희들 더욱 세월을 아끼며 늘 깨어 근신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코로나19>가 하루 속히 통제되어 저희들의 일상과 주일예배가 정상화되고, 자녀들의 학업과 사회생활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코로나> 와중에도  오랜 장마로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이 적지 않고, 또 태풍 때문에 피해를 당한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 위로하시며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속히 치유하고 복구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 요즘 우리나라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확진자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인데, 부디 더 철저한 관리와 방역수칙 준수로 이 위기와 시련을 잘 극복하고 교회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회복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환자들을 찾아가 주시고, 이 가정예배 조차도 드릴 수 없는 사정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부디 모든 성도들이 주일성수의 소중함과 세상사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의 복됨을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상고할 때 주님의 뜨거운 육성을 듣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0830m

창 25:27-34

다시, <야곱>을 소환하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여러분, 야곱과 이스라엘은 어떤 관계입니까? 야곱은 누구이며,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부자관계, 형제관계입니까? 야곱은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나라입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스라엘이 유대인들의 국호입니다만, 원래는 야곱의 새 이름입니다. 그런데 훗날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들 가운데 유독 야곱에게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느끼게 되어, 아예 자신들과 야곱을 동일시하고, 또 나라 이름까지도 하나님이 직접 작명해주신 야곱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명명했습니다. 현재 지구촌에는 약 228개 국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신 이름으로 국호를 정한 나라는 아마 이스라엘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동일시하고 일체화한 야곱은 어떤 인물입니까? 야곱은 자기의 이름과 그 존재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거짓말쟁이, 사기꾼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실제 그는 자기의 이름 값을 톡톡히 합니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허기져 이성을 잃은 형 에서를 등쳐서 장자권을 빼앗고,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훔칩니다. 또 형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 그의 두 딸과 여종을 자기 아내로 삼고, 외삼촌의 짐승까지도 거의 다 자기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때 야곱은 축복보다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물 같은데도 실은 이 세상에서 야곱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십시오. 원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에서가 장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또 새 이름도 주셨습니다. 이 또한 유래 없는 파격입니다. 발뒤꿈치를 잡은 자,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기상천외하게도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야곱의 새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의 국호로 삼았습니다. 한 개인의 이름이 졸지에 한 나라의 이름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건재합니다. 야곱은 지금도 한 나라와 민족으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그뿐입니까? 이스라엘은 12지파로 이루어져있는데 12족장의 시조가 야곱의 12아들입니다. 이것 또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라 이름도 민족 공동체의 원조들도 다 야곱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브라함 이상으로 다윗 이상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야곱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교활하고 그렇게 야비하고 그렇게 형과 아비를 농락하며 인륜과 천륜을 다 배신한 사람이 어떻게 저주를 안 받고 이스라엘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의 이름과 그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 비결과 비밀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우선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본문 31절 이하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보십시오. 에서와는 쌍둥이였지만, 늦게 나왔기에 야곱은 운명적으로 장자권과는 인연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그런 자기의 숙명에 승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만큼 장자권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넘볼 게 따로 있지 어떻게 동생이 형의 지위를 가로챌 생각을 합니까? 그저 부러워하고 차남된 자기 처지를 비관했으면 했지 어떻게 형으로부터 그 장자직을 사거나 빼앗을 궁리를 합니까? 그 발상부터 상상을 초월합니다. 야곱은 자기 목숨을 걸만큼 장자직을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째서 장자직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게 됐을까요? 그는 왜 장자직에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걸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이 장자를 통해 계승되고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바로 하나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영적 주자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일찍부터 장자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노리다가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허기져 야곱이 쑤고 있는 팥죽을 달라고 하자,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의 장자직을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그러면 팥죽을 주겠노라고 합니다. 형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잽싸게 그러면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서가 절대 다시 돌려달라고 하지 않겠다며 맹세하자 비로소 야곱이 그 대가로 팥죽 한 그릇을 건넵니다. 그래서 죽 중에 가장 비싼 죽이 팥죽입니다. 


보십시오. 두 사람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야곱은 자기의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자직을 정작 에서는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하찮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본문 34절 하반절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시고 야곱을 택하십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더 이상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과 유업을 전승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든지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꿩만 잡으면 매란 말인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조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단 말인가?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도 된다는 말인가? 헌금을 하기 위해서라면 절도를 하고 사기를 쳐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절대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경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은 짓은 분명 인륜을 범한 가장 비열한 죄악이지만, 그러면서까지 장자권을 쟁취하겠다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야곱의 그 무서운 영적 모험이 그의 모든 인간적인 모순과 제약을 상대화했습니다. 그가 장자권에 부여한 그 절대적인 평가가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문제를 완전히 해소했습니다. 장자권에 대한 야곱의 무서운 집념이 그의 수단과 방법의 야비함과 교활함을 상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의 잘못을 탓하고 벌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목숨을 건 장자권 도박에 감복하셔서 저주가 아니라 유래 없는 축복을 베푸사 에서의 하나님에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반면 에서는 전혀 장자권의 소중함을 느끼지도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가지고 있던 장자권 마저도 동생에게 빼앗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장자의 지위와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값진 유업을 이을 상속자들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따라서 이 장자의 명분과 신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 지위와 자격을 가볍게 여겨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그 명분을 팔아버리면 버림받습니다. 에서처럼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장자권이냐, 지금 먹고 살기도 바쁜데, 지금 최악의 코로나 정국인데 무슨 주일성수고, 가정예배고 헌금이고 기도냐 하면서 그야말로 팥죽 한 그릇에 무참하게 내 신앙을 팔고, 내 신자의 신분과 영적 상속자의 지위를 팔아버리는 사람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이 에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최근 우리 교단의 교세 통계에 보면, 올해만 벌써 4만 7천 명이 교회를 떠났거나 신앙을 버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영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사고 주식을 산다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저는 영끌이 아니라 영팔이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너무 쉽고 허무하게 파는 사람들이 영팔입니다. 에서가 바로 그랬습니다. 에서가 영팔의 원조입니다. 배고프다고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하며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판 영팔이,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맙시다. 어려워서 내 모든 걸 다 판다 해도 영혼은 팔지 맙시다. 영혼을 팔면 하나님도 잃고, 장자로서 상속할 천국도 날아갑니다. 이 코로나 시대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교인들이 코로나19의 전파자들이라며 비난한다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부끄러워하거나 내던지지 맙시다. 오히려 야곱처럼 목숨을 걸고라도,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신분과 하나님 자녀됨의 지위를 지킵시다. 그래야 야곱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사 야곱을 지키셨듯이 오늘 우리를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으로 야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창세기 27장 18절 이하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이 대목은 야곱이 형 에서로 가장해서 나이 많아 눈 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아비가 장자에게 내리는 최후의 축복을 가로채는 아주 극적인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장남에게 마지막 축복기도를 합니다. 적어도 그들은 아버지의 그 마지막 축도를 통해 하나님의 유업이 장자에게로 대물림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대단히 중요하고 결정적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형 에서에게서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지만, 그것으로서는 다 끝난 게 아니었기에 다시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최후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또 한 번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합니다. 어린 염소 새끼를 잡아서 그 가죽을 팔과 목에 감아 털이 많던 형 에서로 가장하고, 또 염소 고기는 사냥해서 요리한 별미라며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이게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속일 게 따로 있지요.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속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야곱은 성공합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훔칩니다. 그러니까 그는 강도짓을 하고 절도짓을 해서라도, 형을 등치고 아버지를 기만해서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반드시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라면 자기는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가치요 절대적 가치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점이 바로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그의 모든 도덕적 한계와 결함, 윤리적 모순을 상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모험도 희생도 야곱처럼 불사해야 합니다. 야곱은 실제 저주까지도 각오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했습니다. 창세기 27장 12절에서 야곱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그 모든 일을 결행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라면 그는 저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저주가 아니라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축복에 최고의 가치를 둔 야곱의 믿음을 그의 모든 패륜보다 더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세상적 가치보다 믿음의 가치, 세상적 영화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 귀하게 여깁시다. 야곱처럼 그것을 필사적으로 추구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모험하고 도박하십시오. 그래야 복됩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야곱은 평생 그 무엇보다 기도생활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창세기 28장 10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벧엘에서 노숙하다가 하나님을 뵙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베고 자던 돌기둥을 세우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바친 대목이 나옵니다. 또 32장 24절 이하에는 귀향길에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하듯 처절하게 기도하는 유명한 장면도 나옵니다. 세상에서 야곱만큼 전투적이고 공격적이고 호전적으로 기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야곱의 기도는 무섭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격렬하고 지독했으면 하나님마저도 두 손을 드셨겠습니까? 특히 얍복 강가의 기도는 역대급입니다. 야곱이 밤새껏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날이 새려하는데도 여전히 야곱이 하나님을 놓아주지 않자 하나님은 야곱이 더 이상 힘을 못 쓰도록 그의 허벅지 관절, 곧 환도뼈를 쳐서 골절시킵니다. 그런데도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여전히 붙들고 늘어지면서 당신이 내게 축복해주지 않으면 절대 가시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백기를 드시며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을 이겨야 복을 받습니다. 또 누구나 이렇게 야곱처럼 투쟁적으로 집요하게 날 샐 때까지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강하고 엄한 체 해도 자식에게 집니다. 날 샐 때쯤 되면 자식이 이깁니다. 마찬가집니다. 하나님도 언제나 우리에게 져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녀된 우리에게 져주실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뭐로보나 열심히 기도해야 할 참으로 비상한 위기의 때입니다. 야곱의 벧엘기도처럼 서원이라도 하고, 얍복 강가의 기도처럼 처절하게 씨름하듯 기도해야 할 절박한 시대입니다. 기도 없이 살아갈 생각하지 맙시다. 기도 없이 복 받을 생각하지 맙시다. 기도 없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평안해질 것으로 기대하지 맙시다. 야곱 같은 사람도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기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 또 사기꾼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부디 야곱의 기도를 배웁시다. 그래서 여러분도 모두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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