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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불 같은 시련
설교본문 벧전 1:3-9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8-23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823m.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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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기도문


주님, 저희들 또다시 이렇게 주일예배를 교회에서 드리지 못하고 각 가정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시고, 교회나 가정이나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께서 가정예배로 드리는 저희의 이 주일예배를 축복하사 은혜와 결단의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은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이나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고, 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사오니 오늘도 이 조촐한 가정예배와 함께 하사 저희의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좀처럼 잡히지 않는 <코로나19>를 하루 속히 퇴치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옵소서. 지금 온 지구촌이 <코로나19>로 큰 고통과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사오니 보다 철저한 방역과 신속한 백신 개발로 반드시 정복할 수 있게 하시고, 또한 뼈아픈 자성과 회개를 통해 다시는 이런 감염병 재앙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 모두를 깊이 깨우쳐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이 벌써 무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가을 날씨가 시작된다는 처서입니다. 

저희들 <코로나>로 인한 이 혼란한 와중에도 부단히 자신을 살피고 믿음의 열매를 준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저희들 잠시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비록 현장이 아닌 영상으로 만나는 말씀이나 집중하여 주님의 육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성령의 뜨거운 위로와 격려도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0823m

벧전 1:3-9

불 같은 시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지난 3월 이후 5개월 만에 다시 주일예배를 각 가정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에서 확진자가 대거 발생하여 내려진 조치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이 위기상황이 더는 악화되지 않고 진정되어 9월 첫 주일부터는 다시 교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성도 여러분도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도 웃으며 태어나지 않고 울며 태어났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태어났다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울며 태어나서 평생을 시련 속에서 울며 살다가 결국 남은 가족에게 슬픔과 울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운명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련처럼 공평한 것도 없습니다. 시련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당하는 사람은 자기만 시련을 겪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련은 빈부나 귀천, 때와 장소,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시련을 덜 당하거나, 약하게 당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굳이 믿는 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있다면, 그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고 해석하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주후 64년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해로 기억됩니다. 그해 로마 시가지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정확히는 64년 7월 19일입니다. 그 불은 방화였고, 그 주범은 네로 황제였습니다. 네로가 낡은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미치광이 황제가 방화 주범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궁중으로 몰려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네로는 이미 희생양을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로마 당국의 무자비한 박해가 본격화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다 그때 네로 황제에게 순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고, 바울은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68년 네로가 폐위된 후에도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디오클레시안,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같은 황제가 계속 기독교를 박해해서 로마 제국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주후 3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세상에서 기독교가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 해방령인 밀라노 칙령이 내려지자, 지난 250년 동안 땅 속에서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그 혹독한 카타콤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본문인 베드로서는 그 모진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인 주후 63년에 씌어진 서신입니다. 코앞에 닥친 박해를 예감하면서 성도로 하여금 그 불 같은 시련을 끝까지 잘 견디고 이기도록 하기 위해 베드로 사도가 생애 마지막에 쓴 편지가 바로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여러분, 시련은 왜 있을까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시련도 나를 피해 달아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련이라는 말은 원래 광산에서 쓰던 말이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불순물이 많이 섞여 저급한 금을 정금으로 만들 때 제련하고 정련하는 과정을 <도키미온>, 곧 시련이라고 불렀습니다. 금광에서 금을 캐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노다지 캔다고 하는데, 노다지는 금광 막장에서 정말 노란 순금을 직접 캐는 것을 말하는데,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보통은 금이 함유된 금광석을 채석하여 그것을 기계로 빻습니다. 그 돌가루를 물에 넣으면 금을 함유한 가루는 물에 가라앉고, 가벼운 돌가루는 물에 떠서 씻겨 나가는데 그 작업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정제한다 해도 아직은 고운 모래로 보일 뿐 전혀 금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금광석 가루를 도가니에 담아 풀무불 속에 넣습니다. 계속 풀무질하여 온도를 높이면 금과 섞여 있던 불순물이 타 없어지면서 비로소 노란 금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오랜 풀무질을 하면 할수록 정금으로 정련됩니다. 이 과정이 비로 <도키미온>, 시련입니다. 그러니까 시련이 혹독하면 할수록 금은 그만큼 순도가 높아집니다. 


요즘은 전자 측정기로 정확히 금의 순도가 수치로 표시됩니다. 예전에는 전문가들이 금의 빛깔을 보고 순도를 측정했습니다. 금을 검은 돌판에 갈아서 그 빛깔을 보고 순도를 결정했습니다. 순도에 따라 그 빛깔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8K와 24K는 우리 눈에도 빛깔이 다릅니다. 순금은 처음부터 99.9%가 아니라 풀무불 속에서 모진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비로소 높은 순도로 정제되고 정련된 것입니다. 18K도 마찬가집니다. 지금이라도 제련만 하면, 시련의 과정만 거치면 불순물이 제거되어 99.9%의 순금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무서워서, 풀무불에 들어가는 고난이 두려워 시련을 피하면 18K로 남아야 합니다. 시련이 없는 정금은 없습니다. 시련이 그 금의 순도와 질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불 같은 시련을 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을 보다 순도 높은 믿음으로, 순도 99.9%의 정금으로 정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믿음을 18K가 아니라 정금이 되도록 하기 위해 모진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은 불타지 않습니다. 시련이 아무리 혹독해도 금은 불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온도를 높여도 다른 물질은 다 타도 금은 타지 않고 오히려 금의 순도만 높아질 뿐입니다. 누구보다 혹독하고 처절한 풀무불 시련을 겪었던 욥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욥기 23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 시련이 절대 불행만이 아니고 얼마든지 축복일 수 있다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디 믿는 자들의 불 같은 시련의 신비와 비밀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최악의 위기와 그야말로 불 같은 시련에 직면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교회들이 방역당국과도 각을 세우는 사이 국민들은 모든 교회를 싸잡아 욕하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일부 교회가 국가 방역에 도전하고 있다며 엄벌하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물론 억울한 측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간 나름 최선을 다해 상황을 관리해왔고, 방역에도 총력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한 일부 교회가 다 한국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사회로부터의 비난과 성토를 다 감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부디 지금의 이 안팎의 혹독한 시련이 더욱 한국 교회의 영성을 순수하고 투명하게 하고, 우리 믿음의 순도를 정금 같이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혹독한 시련을 당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찬양하라고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련을 이야기하면서 일단 찬송부터 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쁠 때는 몰라도 시련당할 때 찬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예배 시간에도 입술로 찬송을 부를 수 없을 때 마음과 영혼으로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전도하다 졸지에 붙잡혔습니다. 관원들이 두 사람의 등짝을 너덜너덜하도록 채찍질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깊은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낙담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신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놀랍게도 찬송했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영혼으로 신음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다 열리고, 그들 손발에 채워졌던 착고가 다 풀렸습니다. 그날 밤 더욱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고문하던 옥사장이 회개하고 그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집이 아예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반전이고 역전입니까? 지하 감옥에 갇혔다고, 어두운 심연에 떨어졌다고, 맞은 상처가 아프고 쓰리다고 악 쓰지 맙시다. 그 깊은 데서, 그 어둠 속에서 마음으로 영혼으로 찬송합시다. 반드시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여러분을 결박하던 모든 것이 풀리는 그런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다음은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8절 이하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시련 중에 고백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시련 중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평안할 때야 사랑한다, 기뻐한다, 감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과 감사는 오히려 시련 당할 때 고백하는 그 역설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이하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주님도 너희가 환난을 당할 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어떻게 시련 한복판에서 신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고난의 의미와 신비, 시련의 비밀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불행이나 저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축복과 은혜란 사실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연단>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대장장이가 녹슨 쇳덩어리로 연장을 만드는 작업을 뜻합니다. 대장장이는 쇳덩이를 풀무불에 넣어 달궜다가 끄집어내어 망치로 두드린 후 물에 넣어 식힙니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여 마침내 연장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대장장이는 낫, 호미, 괭이 등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녹슨 쇳덩어리는 반드시 달구고 식히고 망치질하고 잘라내고 붙이는 연단 과정을 통해 쓸모 있는 연장으로 거듭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시련이라는 연단 과정이 없으면, 주님께 합당한 인격으로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시련이라는 혹독한 연단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님의 성품을 닮은 새로운 인격체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련이 오히려 감사도 되고, 기쁨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시련, 가정적인 시련, 교회적 시련, 사회적 시련 앞에서 함부로 절망하거나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너무 비관하거나 회의에 빠지지도 맙시다. 오히려 마음으로 영혼으로 찬송합시다. 하나님이 나를 더욱 정제하셔서 더욱 순도 높은 존재로 만드신다고 믿고 감사합시다. 그래서 모두가 불 같은 시련으로 인해 더욱 복 되고 아름다운 성도로 새로워지는 큰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