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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코로나 시대에도 감사할 수 있을까?
설교본문 고후 1:3-1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7-05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705m.mp3



20200705m

고후 1:3-11

코로나 시대에도 감사할 수 있을까?


(고후 1:3-11, 개정)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은 역사가 참 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절기는 출애굽기 23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함께 주신 율례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첫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기 시작한 절기이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년 전부터 지켜온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지키라고 명하신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의 특징은 모두 감사절입니다. 유월절은 430년 간 종살이하던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감사하는 절기이고, 맥추절은 한 해 밭농사 가운데 제일 먼저 수확하는 보리걷이를 감사하는 절기이고, 초막절은 가을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가 감사절이고, 왜 하나님은 계절마다 한 번씩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일까요? 근본적으로 우리가 감사에 인색하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기에 우리의 한계를 염두에 두셔서 감사를 절기화하고 제도화하여 의무화하여 율법으로 강제하신 것입니다. 요즘은 보릿고개라는 말도 전설에 속하고, 보리 농사도 잘 짓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유대인들에게도 1년 중 가장 혹독하고 견디기 어려운 시기가 보릿고개였습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식량은 다 떨어지고, 아직 햇보리가 여물지 않은 기갈의 시기, 곧 춘궁기는 태산보다 높다고 했고, 누렇게 떠서 굶어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봄에 가장 탐스럽게 피는 이팝나무 아시지요? 그게 왜 이팝나무일까요? 굶주려 누렇게 부황난 백성들의 눈에 그게 쌀밥처럼 보였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다 초여름이 되면 드디어 보리를 수확합니다. 그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우리나라 교회는 매년 맥추절을 감격 속에서 지켰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보릿고개가 없어서 맥추절이라 해도 그런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맥추절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비록 시대가 변해 보리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맥추절의 핵심은 감사절인 만큼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 해의 절반을 중간 정산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올해입니다. 지구촌 전체 초유의 감염병인 코로나19로 얼룩진 해입니다. 고난의 연속이고 마스크와 불황과 두려움에 갇혀 지내는 시기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살얼음 위를 걷듯이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도 고위험 시설로 지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런 코로나 정국 아래에서도 우리가 맥추절을 맞아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바울에게 물어봅시다. 이 세기적인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감사가 가능한지 말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며 시작합니다. 마지막 절인 11절 하반절도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맺습니다. 본문은 찬송으로 시작해 감사로 마치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처음 3절과 11절 사이를 보십시오. 매절마다 환난과 고난이 나옵니다. 환난과 고난이란 말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심지어 사형선고라는 말도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적어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찬송과 감사란 다 환난 가운데도 하나님께 바치는 찬송, 코로나19 중에도 주님께 올리는 감사, 사형선고가 내려진 가운데도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일반적으로 일이 잘 되거나 성공하거나 형통할 때,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시험과 고통 가운데서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환난 중에도 코로나 중에도 찬송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선 우리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뜨거운 위로를 체험합니다. 환난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얼마든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 우리가 병들고, 사업에 실패하고, 버림받고, 마음에 모진 상처를 입어 고통할 때, 주님이 우리 가장 가까이에 다가오십니다. 3절 하반절입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절 상반절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주님은 우리가 환난 당할 때 가장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더 가까이에 주님이 계십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닥치면 성령은 비상체제에 들어갑니다. 절대 우리를 고난의 장에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함께해주시고, 함께 아파해주시고, 함께 울어주시고, 함께 그 시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해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연약할 때가 실은 우리가 가장 강할 때라고도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난 중에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납시다. 환난이 더 이상 환난이 아니고, 불행이 더는 불행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읍시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코로나19 중에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을 통해 고난당하는 이웃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코로나 와중에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얼마나 옳고 정확한 말씀입니까.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만 이웃의 고난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더욱 인간미가 넘치게 합니다. 사람은 따뜻하면 똑똑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그 반대도 많습니다. 그런데 환난을 겪은 사람은 대개 똑똑하고 따뜻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을 깊이 알고 인간미가 넘칩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주님이 직접 수많은 환난을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멸시와 천대와 배신과 고난의 극한까지 가보신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겪는 환난의 정점까지, 지옥까지 내려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환난을 가장 잘 이해하십니다. 그런 분이기에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픔을 겪어봐야 진심으로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로할 수 있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어봐야 진정성 있는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얼마든지 감사해야 할 주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깨우침입니다. 


환난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고 주님을 더욱 굳게 붙잡게 하기에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9절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바울이 겪은 환난이 얼마나 처절하고 절망스러웠으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까지 생각했을까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런 절망적인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돌에 맞아 혼절했는데 사람들이 죽었다고 성 밖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때로 극단적인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니 그게 어찌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날마다 주옥같은 시로 찬양하다가, 후에 왕이 되고 나서 궁중생활을 할 때는 한 편의 찬송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밧세바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는 참회와 탄원의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겁니다.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이야기 아시지요? 그는 이미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는 미국에서 최고의 갑부가 되고,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 주치의 6명이 종합소견서를 내어 1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록펠러가 침대에서 간절히 밤을 세워 기도합니다. 조금만 더 주님 뵐 준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날부터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뉴욕 맨해튼에 교회부터 세웁니다. 허드슨 강변의 리버사이드 처치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전 재산을 다 내놓았습니다. 지금도 록펠러 재단이 간여하지 않은 세계적인 사회사업은 없습니다. 지금 뉴욕 시민은 수도세를 내지 않습니다. 록펠러 재단이 다 부담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건강이 날로 호전되어 6개월 후에 모든 약을 끊고 오직 기도에 전념합니다. 의사들은 55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했는데, 그는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때로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님만을 붙잡게 하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환난이 환난이 아니라 은혜요 축복이므로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 사실에 감사하고 합니다. 


어제 인터넷 뉴스를 보니, UFC 라이트급 챔피언 하빕의 부친이 코로나19로 그저께 사망했다고 합니다. 부친도 유명한 레슬러 출신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패의 챔피언을 만든 아버지가 사망한 것입니다. 57세를 일기로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로나 앞에 장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답이 있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안전과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려고 때로 극한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코로나의 시련도 다 은혜요 축복일 수 있음을 깨달읍시다. 바울처럼 날마다 찬송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