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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원수를 사랑하라!
설교본문 마 5:38-4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6-28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628m.mp3



20200628m

마 5:38-48

원수를 사랑하라!


(마 5:38-48, 개정)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주님의 산상보훈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친 보배로운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보훈입니다. 산상보훈은 처음에는 비올라의 선율처럼 감미롭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아주 아름답게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조금씩 격렬해지다가 결국에는 더는 따를 수 없어 달아날 수밖에 없을 만큼 극한까지 갑니다. 본문도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합니다.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도 벗어주라고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라고 합니다. 


원수사랑이 주님의 산상보훈의 결론이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복음적 삶의 최고봉입니다. 원수사랑은 지독한 역설입니다. 원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응징해야 할 대상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게 원수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중국이나 일본의 고전 활극은 원수 갚는 게 주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토리를 매우 감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수 갚는 게 일반적 정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 갚는 것을 부정하셨습니다. 눈은 눈, 이는 이로 갚으라고 들었으나 나는 다시 말하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말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생애를 통해 원수사랑의 신념을 관철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가룟 유다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주님을 체포합니다. 제자들은 다 달아났는데 그래도 베드로는 주님 곁을 지키며 몸에 품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립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용감하고 정당했습니다. 죄 없는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의 충정입니다. 이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당방위입니다. 누구도 베드로의 행동을 탓하거나 잘못이락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며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십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칼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시며 절대 보복의 칼을 뽑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상시에는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은 원수들에게 체포되고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원수를 증오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주님을 못 박고, 그 옷을 서로 갖겠다고 제비를 뽑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지금 거기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하면서 비웃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원수에 대한 보복을 철저히 금하셨을까요? 차라리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복수심은 인간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복수심을 행동으로 옮기면 싸움으로 번지거나 심지어는 전쟁에 이릅니다. 피는 피를, 이는 이를, 눈은 눈을 부릅니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보복은 다시 보복을 부릅니다. 복수의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정권 교체와 정치 보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듯한 명분을 만들지만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고 맙니다. 그동안 칼에 피를 많이 묻혔고, 이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복수와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슬람 무장단체를 보면, 피의 보복을 다짐하며 테러를 감행합니다. 보복을 권리나 정의라 생각한다면, 주님의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이 감상적이고 순진하며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제자들조차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며 달아났습니다. 산상보훈을 가졌다는 기독교가 이 세상 그 어떤 종교보다 피를 많이 흘린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며 십자군 전쟁 같은 종교전쟁, 마녀사냥 같은 종교재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쳤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원수사랑의 가르침을 가장 전투적으로 배신하고 반역한 세력은 바로 교회입니다. 중세 1,000년간 암흑기를 지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온 몸으로 살고 전 생애를 바쳐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밀림의 성자’라고 부릅니다. 슈바이처는 주님의 여러 가르침 가운데 산상수훈의 평화사상, 무저항, 비폭력을 가장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슈바이처는 루터교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슈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해서 1899년에는 철학박사, 이듬해 1900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의학박사는 그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공부해서 1913년에 받았습니다. 그는 목사안수도 받고 부목사로 교회사역도 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파이프 오르간 제작자겸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바흐의 탁월한 해석자였습니다. 슈바이처는 다방면에서 업적과 성과를 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시 신약성경에 관한 연구업적입니다. 아프리카 의료선교사로서의 업적이 대단해서 그의 신학적 업적이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실로 대단합니다. 그가 1906년에 낸 책이 <라이마루스부터 브레데까지>라는 책을 냈는데, 그 부제가 잘 알려졌습니다. ‘역사적 예수 생애에 관한 연구’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주님의 복음을 철저히 종말론적 선포로 규정했습니다. 주님이 선포한 모든 복음의 내용은 종말의 키워드가 없이는 조명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종말론을 철저적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공생애에 들어간 주님이 최초로 선포한 것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종말론적입니까. 주님은 3년간 그 말씀을 선포하고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윤리도 종말론적 윤리로 규정했습니다. 종말과 재림 사이의 비상한 중간윤리라고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실천보다는 이상적인 최고 목표로 말씀을 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산상보훈을 이렇게 얼버무리며 넘어가고 맙니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이기는 하나 현실성이 없다는 겁니다. 슈바이처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면 종말론적 윤리를 지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종교입니다. 주님이 올 연말이나 내년에 반드시 오신다고 해도 여러분은 절대 속옷까지는 벗어줄 수 없습니까? 원수를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까? 슈바이처는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임박한 종말론적 신앙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종말신앙으로 살면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종말론적 긴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에 죽을 수도 있고, 내년에 주님을 맞이할 수도 있음에도 종말론적 긴장이 없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실천하라고 산상보훈을 주셨습니다. 윤리적 규범 제시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의 복음은 분명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도적을 말씀하시며 오늘밤에 올지도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 앞에 불려갈지 모르는 종말론적 실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종말론적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산상보훈은 종말론적 실존인 성도 개인과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에 주신 종말론적 윤리입니다. 누구나 종말론적 신앙에 투철하면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분단의 시대를 살면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삽시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진정한 피스 메이커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