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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
설교본문 행 2:1-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5-31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531m.mp3



20200531m

행 2:1-4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


(행 2:1-4, 개정)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주일이 소중합니다. 성령강림절은 오늘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의 기원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체적인 출범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 이하입니다.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러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절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때부터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는데 그때 모인 숫자가 120여 명이었습니다(1:15). 


성령이 언제 임하셨습니까? 오순절입니다. 본문 1절과 4절을 보면 그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성령 강림 사건이고, 120여 명의 사도가 원조 교회인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창립멤버였습니다. 계획적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창립 예배를 드리고 시작한 것이 아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이 교회가 최초 교회, 원초적 교회인 초대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기원입니다. 


우리가 성령강림과 관련해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오순절 절기입니다. 왜 성령강림이 굳이 오순절에 발생했느냐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오순절 성령강림일까요? 이것은 우연은 아닙니다. 오순절은 맥추절입니다. 보리수확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유대인의 최대 절기인 유월절로부터 50일 째 지키는 절기라 하여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의 또 다른 이름은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은 보리가 그 해 밭농사의 첫 수확이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강림 사건이 오순절에 발생한 것은 오순절이 초실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보리가 한 해 밭농사의 첫 열매였듯이 성령강림 사건도 앞으로 전개될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 즉 교회 시대의 첫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는 성령강림이 없었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3절 이하입니다.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그러니까 구약 시대 때도 성령이 역사했습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주님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있었지만, 아직 오순절 전에는 본격적인 성령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오순절 이전의 성령 역사는 부분적이고 잠정적이었지만 구속사적인 면에서는 성령이 역사의 주체인 시대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부 시대와 성자 시대 이후 교회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말세의 주인공은 성령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이 마지막 성령 시대를 공식적으로 개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대단했습니다. 본문 2절 이하입니다.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요즘도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바람소리, 불길, 방언 같은 현상이 없으면 아직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 아닙니까? 사실 요즘은 이런 현상이 드뭅니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요즘은 이런 현상이 드문 것은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은 성령이 거의 역사하지 않거나 강림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와는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나타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성령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편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현상들이 이후 모든 사건에 동일한 현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특수한 사건이었습니다. 성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의 시대를 알리는 선언적 의미가 컸습니다. 도래한 새 시대를 강력한 인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었기에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현상을 일반화하면 안 됩니다. 바람소리가 안 나고, 불이 안 보이고, 방언이 터지지 않을 때 성령강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굳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처럼 할 필요가 없기에 성령이 역사하셔도 그런 초자연적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도 성령이 역사하실 때, 방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성령의 역사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바울은 그런 현상들보다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더욱 확실한 성령 역사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주님이 성령에 관해 언급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주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지키고 보호하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곁에 라는 뜻의 <파라>와 돌보다는 뜻의 <클레오>라는 합성어인데, 직역하면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돕는 파라클레토스셨고,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며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무엇을 돕겠다고 하십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은 오직 믿는 자 안에 거하시고, 믿는 자가 그분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 절대 목사가 아닙니다. 구역장, 교회학교 교사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은혜 받게 하시고,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결단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절도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누구도 자기 의지로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2,000년 전 불과 33년 살다 간 전설 같은 인물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성령이 역사해야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갈팡질팡했습니까?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그들은 낙향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모두 불덩어리가 되어 주님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떡을 주지 않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할까요? 요즘 같은 코로나19 사태 때는 예배당에 오기도 번거롭고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강제로 교회도 나오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기호, 노력과 수고만으로 예수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께 덜미 잡혀서 천국으로 견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왕이면 성령충만해야 그만큼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기도를 잘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까? 성경은 성령이 탄식할 정도로 우리가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처럼 빌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시는 잘 쓰는데, 정작 무엇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합당한지는 모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어질 것, 결국은 우리를 해칠 무기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도 정확히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기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고, 중언부언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지금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널(우리)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기도를 돕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도우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보혜사 성령이 우리 곁에서 삶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성령을 보내사 영원토록 너희를 돕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면 그 어떤 상황과 최악의 조건도 최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질그릇은 우리이고, 보배는 성령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성도들도 살아가며 자주 우겨 쌈을 당하고, 얼마든지 답답한 일을 만나고, 핍박도 받고, 거꾸러뜨림도 겪습니다. 그러나 질그릇에 담긴 보배인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에 세상이 우리를 우겨 싸고, 거꾸러뜨려도 깨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누가 우리를 유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성령충만의 반대는 이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마가복음 3장 2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 모독과 성령훼방입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 근심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성령충만을 원하지만 삶으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외면하고 묵살하고 학대하고 고문하고, 철저하게 모독하며 날마다 성령을 소멸하며 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곁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돕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늘 성령께 붙잡혀 온전한 지배를 받읍시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응답하고 결단하며 삽시다.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의 삶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욱 아름답고 강건하고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