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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사람을 지으시다
설교본문 창 2:7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5-24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524m.mp3



20200524m

창 2:7

사람을 지으시다


(창 2:7, 개정)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1장 25절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사역 다섯째 날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지금까지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게 하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이루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신 부분은 육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창 3:19). 그런데 사람의 구성요소는 육체가 전부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일단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셨는데, 그것은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로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는 무엇입니까? 히브리 말로는 <루아흐>입니다. 이것을 그리스 말로는 <프쉬케>, 라틴말로는 <아니마>, 영어로는 soul, 독일말로는 Seele, 우리말로는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생령이라는 말의 원어는 <네페쉬>입니다. 그 뜻은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네페쉬, 생령이라는 말은 흙이라는 육체와 생기를 뜻하는 루아흐가 만나 완전체를 이룬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네페쉬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늘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언제나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도 사모합니다. 아무리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풍족해도 정신적-영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늘 공허한 것이 사람입니다. 경제적인 여유만 보장되고,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이고 정신적 기갈이 해소되어야 제대로 살 수 있고 진정한 만족을 할 수 있습니다. 부자나 인기 있는 연예인이 자살합니다. 영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에 늘 공허하고 불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왜 저런 사람들이 자살할까 싶지만 자살률이 더 높습니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사람은 육체를 위한 떡도 필요하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떡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족될 때 전인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그 코에 영혼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매우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추구합니다. 영적인 데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 길로만 간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그런 길을 따라 걸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을 팔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루아흐를 지닌 존재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네페쉬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 20절 이하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27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일단 고민부터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결정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형상은 시공간 안에서만 성립됩니다. 즉 하나님은 특정한 모양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다. 형상은 제한성, 유한성을 뜻합니다. 만일 신이 특정한 형상을 가졌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제2계명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신을 형상으로 만드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외적 형상이 아니라 내적 형상,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대로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품성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하나님의 내적 형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격입니다. 지성, 감성, 의지입니다. 인격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내적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에게는 인격이란 것이 있습니다. 인격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인격은 없고 본능만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그 원형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에는 인간 외에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피조물과는 다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의 본체이시고, 이웃은 나와 똑같은 형상을 지닌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인격적이어야 하지만 이웃과 관계를 맺을 때도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 가장 인격적이고, 가장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러한 관계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우리>라고 하십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칭호도 단수인 <엘>이나 <엘로아흐>가 아니라 복수인 <엘로힘>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유일신 하나님이 왜 복수의 이름을 지닐까요? 원래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유일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참 신이라는 의미에서 유일신입니다. 그러니까 유일신은 숫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세 분이 완벽히 한 분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숫적으로는 세 분이면서 본질적으로는 한 분으로 존재하는 것을 신학적인 개념으로는 삼위일체라 부릅니다. 엄연히 남녀 두 사람인데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완벽한 조화와 타협과 하나를 이루며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명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도 사회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관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 완벽한 조화 속에서 관계적 존재로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당연히 관계적 존재입니다. 사람도 더불어 살 때만 사람입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를 보십시오. 사람의 사이입니다. 하나님이 세 분과의 관계 속에 계시듯이 사람도 사람 사이에서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무시하고 이기주의, 개인주의, 고립주의에 빠지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며 관계적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들의 가장 고귀한 삶의 좌우명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계를 해치는 원수가 죄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아담의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치명적으로 해칩니다.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두려워서 숨는 관계로 전락시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역시도 위치가 아니라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가인이 왜 그걸 물으십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형제와의 관계도 참혹하게 깹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완전히 망가뜨립니다. 창세기 3장 17절 이하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관계에서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 때문입니다.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