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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작은 여우를 잡으라!
설교본문 아 2:15-17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5-17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517m.mp3

20200517m

아 2:15-17

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 2:15-17, 개정)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1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17]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가(雅歌)서는 솔로몬의 작품입니다. 1장 1절입니다. “솔로몬의 아가라” 우리말 제목인 아가라는 말은 우아한 노래,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원제목은 <쉬르 하쉬림>, 곧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아가할 때 아는 바를 아자입니다. 내용은 솔로몬이 포도원에서 일하던 북쪽 시골 술람미 지역의 여인을 사랑해서 부른 연가입니다. 아가서에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노골적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이 책이 오랫동안 19금이 아니라 30금 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 못지않게 그런 사랑에 대한 위기를 경고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특히 본문이 그렇습니다. 


본문은 포도원을 한 가정으로 묘사하면서 부부가 잘 관리하라고 당부합니다. 특히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합니다. 15절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포도원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었을 때, 여우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여우들은 이 시기에 극성이라는 겁니다. 팔레스틴에는 원래 여우가 많았습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 맨 손으로 무려 300마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의 여우는 포도 농사에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여우들은 포도원에 들어가 사방에 구덩이를 파고 뿌리를 갉고, 줄기를 찢어서 시샘이라도 하듯 한창 포도꽃이 필 때 더 난리를 쳐서 해마다 포도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우리 문화에서도 여우같다는 말은 교활하다는 뜻으로 부정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을 교활하게 해코지 한다고 해서 암몬 족속을 늘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주님도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말씀도 교활한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는데 당신은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본문의 여우는 한 마리의 여우가 아니라 작은 여우들이라는 복수입니다. 작은 여우들이 가정을 무너뜨린다는 겁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우선 열등감입니다. 1장 5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게달의 장막은 유목민이 장막을 치고 그 위에 씌우는 시커먼 덮개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희고 세련된 예루살렘 여인에 비해 자신의 피부가 검고 거칠다는 사실에 대해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콤플렉스였습니다. 6절도 보십시오.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당시 술람미 여인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솔로몬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본인은 심각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찬가는 이보다 더 감미로울 수 없습니다. 1장 2절입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15절도 보십시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5장 10절 이하도 보십시오. “[10]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11]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12]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13]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14]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15]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7장 6절 이하입니다.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 [10]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11]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솔로몬 왕의 사랑을 이렇게 듬뿍 받으면서도 이 여인은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도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부부는 상대의 콤플렉스를 감싸야 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실 때 돕는 베필로 지으셨습니다. 부부란 처음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남편은 아내의 약점을 덮어야 합니다. 서로가 콤플렉스를 극복하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세상은 늘 우리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점을 최대한 숨기며 삽니다. 혹시라도 남이 내 열등감을 눈치 챌까 시침을 떼고 삽니다. 하지만 가정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정은 내 열등감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의 도움으로 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치유되지 못한 열등감이 결국 작은 여우가 되어 우리의 포도원을 헌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열등감은 잘 극복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한 인격자가 되게 하지만, 도발 당하거나 공격을 받아 상처가 생기면 그것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정서로 나타납니다. 과장, 허세, 보복, 폭력 등이 치유되지 못한 나의 열등감의 발원입니다. 부디 여러분의 포도원을 허는 열등감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우를 꼭 잡으십시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없습니다. 


다음은 고독입니다. 3장 1절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것은 가정 속의 고독입니다. 가정에서 고독을 느낀다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가정이란 고독에 대한 하나님의 원초적 처방입니다. 하나님은 돕는 베필로 하와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아담이 홀로 사는 게 좋지 않아서 하와를 짝지어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렇게 해야만 고독이 극복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제각기 사는 외로운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이불을 덮고 살고, 한 솥 밥을 먹지만 서로 각각의 세계에서 사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의 가정은 어쩌면 여인숙일지 모릅니다. 편리하고 좋은 집들은 늘어가지만 부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은 점점 귀해져가고 있습니다. 한 몸이 되어야 비로소 부부인데 그렇지 못하고 다 제각각이기에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녀들은 자녀대로 자기들의 딴 세상에서 삽니다. 요즘 이혼율 왜 많이 할까요? 왜 결혼하면서 절반가량이 이미 이혼을 예약할까요? 하나님은 남녀가 결혼해 한 몸이 되어야 외롭지 않고 원초적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한 몸이 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도 모든 것이 따로따로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판을 깨는 것입니다. 가정의 고독, 부부의 고독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입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여우입니다. 여우를 잡지 않으면 여러분의 포도원이 위험합니다. 한 몸이 되셔서 서로 고독을 치유해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포도원이 끝까지 안전합니다. 


무관심도 여우입니다. 아가서 5장의 내용이 부부간의 무관심에 관한 경고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이미 고독의 단계도 지난 상태입니다. 이미 서로를 포기하고 완전히 체념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더는 질투도 미움도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하루를 정물처럼 살아갑니다. 아무런 감정이나 표정 없이 기계처럼 사는 것입니다. 남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남편이나 아내가 외도를 해도 흥분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사는 부부가 적지 않은 현실입니다. 부부 간에도 자녀 사이에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도 서로 문자를 보냅니다. 여러분, 부부지간의 무관심, 가족에 대한 무관심은 죄악입니다. 아내의 애로와 고독, 남편의 고통과 아픔, 자녀의 필요와 고민이 무엇인지를 서로 묻고 부단히 대화하며 소통하며 살아야 성서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아내를 위해 남편이, 남편이 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삭은 늘 아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삭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대단한 아버지와 야곱이라는 아들 사이에 낀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의 재산이나 권력이 남다르지 않았습니다만, 가정적으로는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셋이었습니다. 사라, 하갈, 그두라가 그들입니다. 그래서 자식 간에 아내 사이에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야곱도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평생 리브가와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리브가가 완벽한 여성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결혼한 지 15년이 지나도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참지 못하고 첩을 얻었지만, 이삭은 아내와 함께 그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20년 만에 쌍둥이를 얻는데 에서와 야곱입니다. 남편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아내는 많지만, 아내를 위해 그렇게 기도하는 남편은 성경에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내를 위해 많이 기도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기도하면 아내도 자식들도 기도를 배웁니다. 남편이 경건하면, 아내도 자식들도 경건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아내를, 남편을 최고로 사랑하는 길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관심이라는 여우를 잡는 최선의 길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위하여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더는 그냥 두면 안 됩니다. 결국은 별 수 없이 우리의 가정도 무너집니다. 지금 우리의 포도원을 조금씩 헐고 있는 저 작은 여우들을 반드시 잡읍시다. 열등감이라는 여우, 고독이라는 여우, 무관심이라는 여우를 반드시 잡읍시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의 보금자리, 아름다운 포도원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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