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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교회의 불편한 진실
설교본문 막 3:1-6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4-26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426m.mp3

20200426m

막 3:1-6

교회의 불편한 진실


(막 3:1-6, 개정)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본문 1절에 회당이란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그리스 말로는 <시나고게>, 히브리어로는 <에다>입니다. 회당은 성전과는 조금 다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하나입니다. 지방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왜 성전이 하나뿐이었습니까? 성전 안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계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약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언약궤는 바로 그 하나님과의 계약의 담보물이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우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 두 개가 있고, 아론의 자손이 대대로 대제사장이 되라는 뜻으로 싹이 나게 한 아론의 마른 지팡이가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척박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살았던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언약궤는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언약궤를 지성소에 안치함으로써 성립되는 성전은 단 하나였습니다. 언약궤가 있으므로 성전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당은 많았습니다. 지방마다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 없었으므로 안식일에 지방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주중에는 그 회당에서 자녀들에게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은 성전 기능과 학교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은 유대교의 본산입니다. 유대 공동체의 전통적인 구심 공간이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 100만이 죽고, 수 십 만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해외로 도망쳤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구약시대 때부터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며 수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가 살았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흩어진 유대인이라는 뜻의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전통을 계승하며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2-3000년이 넘도록 살았어도 자신들의 전통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 회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회당이 있고, 거기에서 자기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기들의 언어로 율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문화와 전통을 계승하며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 공동체였던 회당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교회의 전신입니다. 교회의 구약적 모델이 회당입니다. 실제 회당이라는 말인 시나고게와 교회란 말인 에클레시아는 거의 같은 뜻입니다. 시나고게를 히브리말로는 에다라고 하고, 에클레시아의 히브리어는 카할입니다. 에다와 카할도 같은 의미입니다. 에다는 좀 더 공간적 의미가 강하고, 카할은 공간적 의미보다는 공동체라는 의미가 좀 더 강할 뿐입니다. 한자로도 회당은 모이는 집이고, 교회는 가르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예배당이나 신자들이 모이는 건물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건물에 간판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공동체라는 의미도 있지만, 회당처럼 믿는 자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도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공동체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회당처럼 공간적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도 회당의 후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시대의 회당의 모습과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여러분, 회당이나 교회는 늘 멀쩡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결코 성한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회당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이고,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공동체이니까 건강하고 장애가 없고 모두가 영육 간에 반듯한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마가복음 1장만해도 주님이 회당 안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장면이 나오고,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고, 6장에 가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도 나옵니다. 교회는 마치 병원과도 같습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며, 나는 병든 자를 고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 기대와는 달리 온갖 장애인이 다 있습니다. 하여간 멀쩡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 교회입니다. 이것이 현실 교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서로 손발이 맞지 않고,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아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모두 나름 장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나만 멀쩡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지 다른 이가 나를 볼 때는 나 또한 중증환자입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처럼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상처투성이입니다. 교회생활하시면서 아픔과 상처를 겪었다면 양해하십시오. 그동안 나도 남 못지않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목사도 성도들을 해치기도 했지만, 성도로 인해 목사도 상처를 얻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란 원래 그런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교회의 불편한 진실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2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장애인뿐만 아니라 주님을 책잡으려고 호시탐탐 엿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음에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모함하기 위해 주시하는 사람들, 5절도 보면 마음이 완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탄식과 노여움을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6절을 보면 주님을 죽이려고 헤롯당과 모의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회당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교회 모습이기도 합니다. 절대 교회는 이상적 공동체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의 공동체라기보다 병든 이들의 공동체, 의인들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개척해 3년간 목회했던 에베소교회를 보십시오. 바울이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며 목회한 교회는 이 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럼에도 에베소교회조차 절대 이상적인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책망이 나옵니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이것이 바로 적나라한 현실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꾸만 천국을 찾습니다. 결코 교회는 작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상처를 입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같은 교회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보다 냉정하게 해야 합니다. 막연하거나 맹목적인, 일방적인 기대로만 교회를 이해하면 평생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교회를 기웃거리다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물론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의인들의 공동체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의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데도 의인으로 불러주는 공동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죄인이나 주님 덕분에 숙명적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죄를 범하며 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죄인이면서 의인, 의인이면서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설, 이 도그마, 이 변증법을 잘 알아야 비로소 진정한 신자가 됩니다. 그래야 신자의 비밀이 풀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노아의 방주와도 같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구원의 방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라하고 답답했고 온갖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로 늘 시끄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방주는 8명 노아의 가족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300년 동안 노아가 전도했지만, 아무도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혹 여러분을 책잡으려고 모함하고 해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시험에 들었습니까? 일찍이 주님도 회당에서 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현실 교회의 모순이자 한계, 불편한 진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주님 당시 회당의 실상이 그러했지만, 주님은 늘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회당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주님은 항상 회당에 계셨고, 모함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는 주님은 회당에서 백성을 만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1절 이하입니다.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고향 마을의 회당인데 거기서도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5절을 보면, 소수의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온갖 한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부정하고 떠나거나 등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모순에 찼더라도 교회에서 주님이 구원의 사역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2월 7일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관에서 한국 교회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신뢰한다가 31.8%, 신뢰 안 한다가 63.9%입니다. 목회자 신뢰를 묻는 질문에는 68%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이 30%였고, 불교는 26.2%, 개신교는 18.9%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기독교인들은 75.5%가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받고 목회자에게 시험 들고, 이런 저런 고통을 겪는다고 교회를 등지지는 마십시오. 주님은 못난 교회이지만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십니다. 잊지 마십시다. 부디 교회에서 불구가 된 여러분의 손도 치유 받으시고, 상처받은 여러분의 가슴, 병든 영혼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침을 받으십시오. 2020년 4월 현재 사람들의 10명중 6명이 욕하는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통해 구원을 보장받으셨고, 끝까지 자신의 구원을 잘 관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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