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설교제목 천국을 훔치다
설교본문 눅 23:32-33, 39-43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3-29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329m.mp3

0329가정예배.jpg

기도.jpg


주님, 3월 마지막 주일이자 주님의 고난을 기리는 사순절 다섯째 주일 아침입니다. 하오나 저희는 오늘도 교회가 아니라 각 가정에서 이렇게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벌써 한 달째입니다. 부디 다음 주일부터는 꼭 교회에 출석하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 고통하며 신음하는 지구촌을 긍휼히 여기사 하루 속히 이 모진 재앙으로부터 놓여나게 해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게 정지되고, 유보되고 심지어는 올 7월에 개최하려던 도쿄 올림픽마저도 결국은 내년으로 연기되었습니다. 


그동안 힘과 부와 기술을 자랑하며 기고만장했던 저희들의 교만을 용서해주시고, 인간이 실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으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계기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교회들도, 또 성도 개개인도 이번 기회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자신들을 돌아보며 새롭게 결단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시옵소서.

이 유례없는 위기 앞에서 저희들 더욱 기도하며 주님의 고난에 온 몸으로 동참하는 사순절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제 잠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비록 영상으로 접하는 말씀이오나 큰 깨달음과 은혜를 느끼게 하시고, 주님의 따뜻한 사랑과 위로를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0329m

눅 23:32-33, 39-43

천국을 훔치다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처형되신 골고다에는 당시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가운데는 주님이시고, 좌우 양쪽에는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성경 66권에 들지 못한 외경 가운데 <니고데모 복음>이라고도 하고 <빌라도 행전>이라는 문서에는 두 강도의 얘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원래 두 강도는 사촌지간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서 자라며 온갖 못된 짓을 하며 자라다가, 마침내 살인을 저지르고 극형인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원래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자기가 달릴 형틀을 지고 비아돌로로사라는 좁을 길을 통해 형장인 골고다까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인 안토니오 요새에서 골고다까지는 약 1.5km로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그 좁고 긴 비아돌로로사를 오르시다가 몇 번이고 쓰러지셨고, 마지막에는 쓰러진 채 십자가에 짓눌려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길 옆에 있던 구레네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워서 골고다까지 갑니다.


그때 두 강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온갖 저주와 욕설을 다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세상을 저주하고, 심지어는 함께 달린 주님까지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고 조롱하더라.” 본문 39절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주님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최후의 순간, 그 십자가상에서 참 희한한 일,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강도와 함께 소리를 지르며 세상을 저주하고 주님까지도 비웃던 한 편 강도가 돌연 심경에 놀라운 변화를 보인 겁니다. 본문 42절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렇다면 강도의 이런 부탁을 받은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43절입니다.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배치되었던 두 사람이,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죄를 범했던 그 두 강도가 하나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회개와 기도로 천국을 갔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다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테면 구원과 저주의 그 영원한 기로에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기막힌 상징이자 계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야말로 모든 인생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가르는 영원한 분수령이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저주를 결정짓는 시금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어떤 이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회개함으로 천국을 가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다가 결국 지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노아의 홍수에 비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 노아의 홍수의 본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한 목적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또 그 홍수가 당시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에게는 오히려 방주를 물에 띄워주는 결정적인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의 홍수였지만, 방주 안의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는 결정적인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믿고 십자가 앞에 나오면,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표상이 되지만, 어리석고 미련하다며 배척하고 부정하면 오히려 그 십자가로 인해 영원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구원받은 강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철저한 마이너스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미 부랑자로 살았으니 그가 세례를 받았겠습니까, 주일을 성수하고, 헌금하고, 기도를 했겠으며, 구제와 자선, 전도를 했겠습니까? 한 게 있다면 그날까지 그가 남에게 못된 짓만 하고 강도짓 한 것 외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막판에 그것도 땅도 아닌 사형틀인 십자가에 높이 달린 채 죽어가며 극적으로 예수를 믿은 것 뿐인데, 놀랍게도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낙원을 보장받았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저주하고 주님을 욕하던 그 입으로 돌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한 것 뿐인데, 서론도 없이 겨우 본론만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평생을 강도로 살아온 사람이 누가 강도의 고수 아니랄까봐 마지막에는 천국까지도 훔친 겁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의외로 이 강도를 많이 부러워합니다. 왜요? 우리에게는 암암리에 다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이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도 평소에는 좀 더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괜히 일찍부터, 젊어서부터 예수를 믿는 바람에 해보고 싶은 것도 다 못해보고, 피곤한데 주일 아침마다 교회에 가야 하고, 돈이 없는데 십일조도 해야 해서 손해 보고 억울하다는 피해의식, 본전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강도야말로 가장 실리적으로 천국에 간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맞는 생각입니까? 이 강도가 정말 복된 사람입니까? 물론 주일성수 한 번 안 하고 단지 숨 넘어 가기 직전에 회개한 것으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고 큰 행운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구원은 복 된 구원이라기보다 오히려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런 사람도 턱걸이로 천국에는 가지만 천국에 가서 누릴 영광은 별로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상급과 영화란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과 믿음의 내용에 대한 대가이며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생 안 믿고 살다가 막판에 극적으로 회심하고 천국을 간 사람이나, 본문의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한 건 잘해서 천국을 훔친 사람들은 천국을 가도 영원히 부끄러움을 면치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 이하입니다.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땅에서 세운 공적이 많으면 훗날 천국에 가서 큰 상을 받지만, 축적한 공적이 없으면 구원은 받되, 천국은 가되, 마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난 집에서 겨우 구조된 사람을 보십시오. 목숨은 건져서 천만 다행이지만 꼴은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호텔에서 자다 말고 뛰쳐나온 사람들, 목욕탕에서 때 밀다가 불이 나서 뛰쳐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세운 공적이 없어 훗날 천국 가서 받을 상급이 없는 사람은 마치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처럼 부끄러운 모습, 남루한 행색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비록 부끄러운 구원이지만 한 편 강도가 어떻게 그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회심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가사의한 사건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후에도 여전히 다른 강도와 함께 세상을 저주하고 주님을 비웃던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순간에 변해서 주님께 구원을 청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수수께끼 같지 않습니까? 이 강도가 다른 강도보다 덜 악해서 그랬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 강도는 할 수 있었던 회개를 왜 다른 강도는 못했을까요? 똑같은 마을, 똑같은 환경, 똑같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이 강도는 회개를 하고 다른 강도는 회개를 하지 못했을까요? 정말 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이해나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강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숨 떨어지기 3초 전이었으나마 그렇게 회개하고 결국은 천국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비록 살인강도였을망정 그 사람은 엄연히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에 주님이 그 최악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강제로 회개시켜서 그를 천국에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한 편 강도만이 아니라 실은 오늘날 우리도 다 그와 똑같은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구원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회개해서 입니까? 믿어서 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남이 못하는 회개를 여러분은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남이 못 가진 믿음을 여러분은 어떻게 갖게 되었습니까? 남보다 더 잘 나서입니까? 남보다 더 착해서 입니까? 남보다 더 똑똑하고 현명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남보다 더 못나고 어리석고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남이 못한 회개를 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게 되었을까요?


이 한 편 강도의 수수께끼와 똑같은 얘기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택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도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고, 믿어서 천국에 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택함을 받았기에 주님이 나의 믿음을 강제하신 것이고, 나를 회개하게 하신 것이고, 나의 천국행을 강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의 이 강도와 가장 대조되는 인물은 역시 막판에 주님을 배신하고 자살해서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의하면 가장 깊고 뜨거운 제9지옥에 가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는데, 마지막에 타락하고 주님을 배신해서 제9지옥에 떨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음도, 깊음도, 천사도,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도 사탄도, 타락도, 죄악도, 살인강도도, 죽음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천국 백성이라는 우리의 신분, 우리의 정체성을 해소시키고 무효화할 수 있는 것은 천상천하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결코 택함 받은 사람이었지만 믿음에 실패하고 타락하며 주님을 배신해서 버림받고 저주받은 게 아니라,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못한 가라지였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양이 아니라 염소였습니다. 그런데 밀밭에 나는 가라지처럼 알곡에 섞여 있다가 결국 주인의 곳간에 들지 못하고 불구덩이에 던져진 케이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데 신앙생활에 실패해서 지옥 가는 법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한 편 강도는 생전에 오로지 남을 괴롭히며 강도짓 한 것뿐인데 택함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죽어서 기어이 천국을 가게 하셨잖아요. 다만 택함 받은 백성이 이렇게 못나게 굴다 죽으면, 강도짓하다 죽으면 마치 불 속에서 구원받은 사람처럼 가장 부끄럽고 참혹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 비극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천국 백성으로, 당신의 자녀로 택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불러주셔서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와 상급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와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본인이 결단하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로 잠시 이런 상태입니다만, 지금도 얼마든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마음껏 찬양할 수 있고, 원하면 얼마든지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주일도 지킬 수 있고, 헌신과 봉사, 희생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자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훗날 천국에 가서 영원히 누릴 영화를 마음껏 준비하도록 하나님이 넉넉한 기회를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를 일찍 믿게 된 것이 손해가 아니라 그만큼 내게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억울해 하지 맙시다. 마지막 순간에 천국을 훔친 이 강도를 부러워하지 맙시다. 도리어 감사하고 나를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더욱 세월을 아끼고, 건강을 아끼고, 내게 주어진 기회를 아끼며 주님을 위해 삽시다. 그것이 바로 내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자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내 영화를 보다 책임적으로 관리하고 준비하는 삶임을 깊이 깨닫는 복된 성도가 됩시다.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