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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고난의 계절
설교본문 마 4:1-1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3-22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322m.mp3

0322가정예배.jpg


기도문.jpg


주님, 오늘은 저희 모두가 교회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고자 했으나 이렇듯 또 무산됐습니다. 저희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병원이며 성남의 모 교회에서 또 다시 다수의 확진자들이 나와 결국은 다음 주까지도 이렇게 가정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이 딱한 사정을 헤아리사 <코로나19> 사태가 하루 속히 진정되고 종료되어 모든 것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오래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혹 저희의 믿음이 침체되고 예배에 대한 인식이 약해질까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모쪼록 성령으로 저희를 단속하사 오히려 더 뜨거운 믿음과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더 큰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 주시옵소서. 특히 최근에는 저희들 주변에서 많은 확진자들이 발생하고 있어 다들 불안해하고 있사오니 늘 저희의 발길을 지키사 부지중에라도 바이러스 보균자나 전파자와 접촉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주시고, 앞으로는 확진자보다 완치자가 더 크게 늘어 사태가 많이 호전되게 해주시옵소서.


지금도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퇴치를 위해 일선에서 희생하며 수고하고 있사오니 그들을 격려하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또 서로 나누고 기부하는 손길들도 기억해 주시옵소서. 


주님, 이미 계절은 봄입니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전해지고 저희 주변 공원에도 벌써 봄꽃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처럼 얼어붙어 있사오니 주님의 따뜻한 은혜와 사랑으로 녹여주시옵소서. 


지구촌 모든 나라들을 붙드사 함께 이 <코로나19> 재앙을 하루 속히 물리치고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저희들 이번 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저희 인생들에게 던지시는 메시지를 잘 깨닫고 또 바르게 응답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저희들 주시는 말씀을 잠시 상고하고자 합니다. 비록 영상으로 만나는 말씀이오나 집중하며 깨달음과 은혜와 주님의 뜨거운 위로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00322m 

마 4:1-11

고난의 계절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여러분, 지금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전 고난기간이 왜 굳이 사순절일까요? 20일, 이순절일수도 있고, 30일 삼순절일 수도 있는데 굳이 40일을 뜻하는 사순절인 이유는 주님의 40일간의 광야고행을 그 기원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에는 늘 주님의 40일간의 금식기도와 마귀에게 시험당하신 광야고행을 되새기는 게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는 동양권, 특히 유교문화에서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받으셨다는 겁니다. 물론 주님은 그 유혹을 다 이기셨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마귀의 유혹에 주님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입니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나이 40을 불혹지년(不惑之年)이라 해서 더 이상 유혹을 받지 않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시 나이가 40이 아니라 막 30이 되셨기에 수양이 부족해서 불혹이 아니라 유혹을 당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불혹은 없습니다. 마흔이 아니라 백세라 해도 사람은 누구나 죽는 순간까지 유혹에 시달리고, 과제가 크면 클수록 그 유혹도 크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처음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마귀의 유혹을 당하셨지만, 마지막 십자가 앞에서도 유혹에 시달립니다. 주님이 잡히기 전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마지막까지도 고민의 쓴잔을 마시며 피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불혹지년이란 공자님의 말씀이지 주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불혹지년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럼 당시 주님이 당하신 유혹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은 당시에 세 가지 유혹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굳이 주님만의 시험이나 유혹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늘 겪고 당하는 보편적인 시험, 가장 원초적인 유혹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우리와 똑같이 당하시면서 가장 모범적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이기시는 모습을 보여주셨기에 우리가 반드시 귀감으로 삼아야 옳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3절입니다. “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은 물질적인 시험, 육체적인 시험입니다. 주님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셨기에 주님도 우리처럼 안 먹으면 배고프고, 안 마시면 목마른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광야에서 40일은 주야로 금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루만 굶어도 눈앞에 밥이 왔다갔다 하는데, 주님은 40일을 완벽히 굶으셨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한계상황을 뜻합니다. 


그런데 마귀를 보십시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님을 시험합니다. 맨 먼저 마귀는 떡으로 유혹합니다. 이 얼마나 귀신같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광야의 널린 돌멩이가 떡으로 보이는 판인데,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더구나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마귀 자신이 더 잘 알면서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교활합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이제 꼼짝없이 돌로 떡을 만들어 주린 배도 채우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증명해야 되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마귀의 시험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는 떡이 가장 절실한 생존의 여건입니다. 차라리 돌로 떡을 만들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도 증명하고 주린 배도 채우면 마귀의 코도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 주님은 단호히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4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당시 주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귀가 40일을 굶주리신 주님께 떡 제일주의, 물질 지상주의, 맘모니즘을 강요한 게 첫 번째 시험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게 아니라고 하시며 사람은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며 그 시험을 단호히 배격하셨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끊임없이 떡이 전부라며 우리를 속이고 유혹합니다. 떡만 있으면 못할 게 없고, 누구나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떡에 혈안입니다. 모두가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것은 다 떡만 이라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우리의 가치관이 다 전도되고 변질된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의 화신들입니다. 팥죽 한 그릇이라면 뭐든 팔아버릴 기세가 되어 있습니다. 양심도 신앙도 영혼도 하나님까지도 다 팔아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짐승들에게는 떡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떡만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떡을 필요로 하는 육체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육은 떡으로 살지만,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모두가 떡에 미쳐 돌아갑니다.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듭니까?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온갖 불법, 편법, 비리, 투기, 뇌물, 비자금 같은 게 다 돌로 떡을 만들려는 억지고 반칙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을 잔뜩 쌓아두고도 이 야단인데, 주님은 40일을 굶고도 <떡으로만>이라는 마귀의 유혹을 칼처럼 물리치셨습니다. “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떡에 함부로 우리의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5절 이하입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정신적인 시험입니다. 명예심, 허영심, 영웅심을 자극하는 시험입니다. 이것 또한 얼마나 교활한 유혹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 공생애를 앞두고 있습니다. 만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음에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을 열렬히 따르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대스타가 되어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지 않았겠습니까? 단 한 방에 사람들의 지지와 인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다 할 일이 없어 보이는데도 주님은 그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일은 분명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시험하는 불경스런 일입니다. 뛰어내려서 죽으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살면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확인하려는 사랑에는 이미 의심과 불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 주님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겠다며 실제 뛰어내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혹 몸은 전혀 상하지 않는 기적이 발생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 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물리치신 겁니다. 


어떤 믿음 좋은 분이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공개 증명하겠다며 사람을 모아놓고 자기가 사는 20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린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그래 너 믿음 좋다며 사뿐히 받아주실까요?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짓이기에, 하나님은 절대 사람들의 그런 장난과 영웅심과 무책임한 허세에 같이 놀아나시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율동공원에 가서 번지점프를 하면 살아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이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백이면 백 다 죽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어서 인간의 천박한 허영심, 명예심, 공명심 따위나 챙겨주고 계시겠습니까?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역시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조롱하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보라. 그러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래 요놈들아 하면서 내려와 귀싸대기를 한 방씩 갈기고 다시 올라갔겠지만, 주님은 그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지 확인이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시험하지 맙시다. 그것은 큰 죄입니다. 하여간 십일조 외에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독이자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자꾸만 내 사랑을 시험한다면 불쾌하지 않을까요? 과연 그 사랑이 오래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이나 확인의 여지가 없는 완전하고 완벽한 절대적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면, 하나님이 실망하시고 아주 슬퍼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혹입니다. 이것은 가장 치명적인 시험입니다. 사탄이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합니다. 8절 이하입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적 시험이나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라는 정신적 시험과는 차원이 다른 아예 하나님을 배반하라는 영적 시험입니다. 이렇게 마귀의 유혹은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그 고도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광야, 지상입니다. 그 다음은 성전 꼭대기요, 마지막은 산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혹의 강도를 뜻합니다. 마지막 시험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모릅니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 모든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내게 주어질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거기에 걸린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산꼭대기에서 마귀에게 절 한 번 하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식은 죽 먹기입니까? 그 좋은 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이번에도 일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추상같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주님께는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 경배의 대상입니다. 보십시오. 첫 시험에서는 떡만을 강조하는 거짓된 절대를 배격하셨는데, 마지막 시험에서는 <하나님만>이라는 진정한 절대를 내세웁니다. 주님께는 <하나님만>이라는 믿음이 천하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자주 떡을 절대시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세상 영화를 위해 툭하면 마귀에게 절하게 될까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만>이라는 참된 절대가 미약하기 때문이고, <하나님만>이라는 절대가 자주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이라는 절대를 놓치지 맙시다. 이게 흔들리고 놓치면 모든 것이 다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지금 코로나19를 잡기 위해 각국이 백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이 마귀의 유혹에는 백신도 면역도 없습니다. 한 차례 지나갔다고 시험이 다시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시험이 평생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에게는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내가 주님을 늘 내 중심에 모시고 살면, 우리도 주님처럼 이런 마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다. 부디 갈수록 더 교활해지고 악랄해지는 마귀의 물질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주님처럼 말씀으로, <하나님만>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다 물리치시고, 올해는 보란 듯이 모두가 주님처럼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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