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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저 편으로 건너 가자!
설교본문 막 4:35-4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1-26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126m.mp3

20200126m 

막 4:35-41

저 편으로 건너가자!


(막 4:35-41, 개정)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마가복음은 네 권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주후 6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당한 네로 황제 시대 때 마가복음이 기록된 겁니다. 본문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35절에 ‘저물 때에’라는 말은 당시 교회가 처한 어두운 박해상황의 암시이고, 37절에 ‘물결이 배에 가득하다’는 말도 박해의 거센 물결을 의미합니다. 38절 하반절도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는가’ 하는 말은 사도들의 절대절명의 상황과 절박한 심정이 반영된 대목입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배는 주님과 제자들만의 공간이자 세상과는 구별된 특별한 단위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사실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풍랑 없이 잘 살게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바람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더 많은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이전에는 우리가 세상 편이어서 세상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주님 편이기에 세상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우리 삶에 고난이 더 많은 이유입니다. 


35절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갈릴리 건너편으로 주님과 함께 가는 뱃길임에도 어둔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납니다. 이 얼마나 우리의 상식과 기대에 어긋납니까? 우리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살면 큰 풍랑은 없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한 차례 풍랑이야기가 나옵니다.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즉시란 오병이어의 기적 후 즉시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의 초자연적 기적의 감격이 여전한데, 다시 무시무시한 풍랑의 시련이 닥친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늘 기적만 있지 않습니다. 늘 배부르고 넉넉함만 있지 않습니다. 오늘 기적이다 싶으면 내일 풍랑과 싸워야 하는 혹독한 고난이 닥칩니다. 오히려 시련의 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본문에 풍랑이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했겠습니까? 실제로 갈릴리 호수는 위험하다고 합니다. 호수 북쪽의 헬몬산에서 만들어진 차가운 바람이 폭포수처럼 호수 위로 쏟아지면 호수의 따뜻한 수면과 만나면 발작하듯 바람이 인다고 합니다. 우리네 세상살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풍랑이 있습니다. 오병이어라는 초대형 기적 후에도 풍랑은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는 뱃길에도 풍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제자들은 캄캄한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비명을 지르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주님은 배 고물, 선미에서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고군분투하다가, 나중에 주님 생각이 나서 주님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38절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 잠이 오냐는 뜻입니다. 주님이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파도를 잠재우십니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잦아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무시고 계시던 주님을 깨우니까 그 즉시 상황이 종료됩니다. 미친 듯 날뛰던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주님은 자연과 환경도 다스리십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풍랑을 만나면 그 즉시 주님을 깨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밤새 풍랑에 시달려 만신창이가 되어도 주님을 깨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가서야 겨우 주님을 깨워 상처뿐인 구원을 받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깨웠더라면 그 고생을 덜했을텐데 막판에야 주님을 깨우는 바람에 그들은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주님이 상황의 긴박성을 아시고 일단 풍랑부터 잠재우시고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40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마태복음 8장에서는 주님이 풍랑보다 제자들을 먼저 책망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나무라시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풍랑과 믿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깨우지 않으면 안 일어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깨울 때까지 주무십니다. 우리 앞에 어떤 위기가 닥치든지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우기를 바라십니다. 시편 3편에서 다윗은 ‘주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주님을 깨웁니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며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다윗이 맨발로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와 피눈물로 드리는 기도가 시편 3편입니다. 다윗은 위기 때마다 주님을 깨워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깨우기만 하면 즉각 반응하십니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깨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배 고물에서 처음부터 다 지켜보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주님은 풍랑과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의 모습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풍랑도 다 보고 계십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제 힘으로 해결하려고 안간 힘을 다 했습니다. 어떤 노력도 통하지 않자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을 찾습니다. 왜 제자들이 좀 더 일찍 주님을 찾지 못했을까요? 이것은 결국 주님 신뢰 문제입니다. 본문 41절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당시 제자들은 주님을 모시고 가면서도 사실상 주님을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믿음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믿음 없다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배에 함께 타고 계십니다. 캄캄한 밤, 사나운 물결이 우리를 위협할 때도 주님은 우리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존재가 우리 눈에 잘 안 띄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보다 우리를 위협하는 파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풍랑에 가려 주님의 모습이 우리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풍랑보다는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지체하지 말고 달려가 주무시고 계신 주님을 깨웁시다.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려면 나의 재주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절대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읍시다. 보십시오. 주님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지, 배 부리는 기술이나 돈이 없다고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 항해는 오직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면 우리네 운명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주님을 신속히 깨웁시다. 이것이 우리 항해의 성공비결입니다. 


지금은 독일 수도가 베를린입니다. 통독 전의 수도는 본(Bonn)이었습니다. 본의 중심에는 뮌스터 광장이 있고, 그 중앙에 베토벤 동상이 서 있습니다. 거기서 약 300m 좁은 골목길에 들어가면 베토벤의 생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나 작곡 노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엔 일기장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올해가 베토벤 탄생 250주년입니다. 그래서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1770년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알콜 중독자에 매독환자였습니다.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원래 그 집에는 아들만 넷이었는데 첫째는 죽고, 남은 세 아들도 다 폐결핵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다섯 번째 아기를 임신했습니다. 아버지가 중증 매독환자였고, 엄마가 폐결핵 3기였기에 어떻게든 유산을 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베토벤입니다. 예상대로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했고, 30대 중반에는 청력을 잃습니다. 그런 그가 교향곡 제5번 운명을 작곡해, 1808년 12월 22일에 오스트리아 빈 극장에서 초연합니다. 그날 새벽 4시에 쓴 일기가 베토벤하우스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내 운명의 항해사는 주님입니다. 내 기구한 운명을 여기까지 이끈 분도 주님입니다. 주여, 내 인생의 풍랑을 잠재우소서.’ 운명 교향곡 제1악장은 격렬하게 시작하고, 2악장은 평온함을 되찾습니다. 


2020년 새해, 풍랑이 여전하겠지만 베토벤의 고백처럼,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면 신속히 주님을 깨웁시다.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이 운명 교향곡 2악장처럼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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