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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염려하지 말라!
설교본문 마 6:25-3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20-01-19
설교오디오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200119m.mp3

20200119m

마 6:25-34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개정)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올해도 우리는 연초부터 많은 염려와 걱정의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고, 사방에 올무와 복병이 널린 위험천만한 세상을 사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염려와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학, 취업, 건강, 전월세 등 우리는 한순간도 염려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오늘 소개한 본문에는 염려라는 말이 6번 등장합니다. 당연히 염려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 먹이고 입히시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일 일을 미리 앞당겨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보다 우리에게 더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도 흔치 않지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려면 삶의 부조리와 모순이 없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염려의 불가피성을 역설한다 해도 염려는 백해무익입니다. 주님은 너희 가운데 염려하므로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염려해서 키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비생산적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염려가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엄마 아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엄마 아빠가 해결한다고 믿기 때문에 염려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근심 걱정 없이 놉니다. 엄마 아빠를 믿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있는데도 아이가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한다면 그 아이가 어찌 정상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염려를 믿음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염려를 불신앙의 소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런 믿음이 없어서 염려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야 말로 현실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로 보신 겁니다. 


주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우선 내 삶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8절 이하도 보십시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이 왜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새나 백합화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들이 굶지도 않고 헐벗지도 않고 살아가는 재주를 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새와 백합의 존재의 근거, 생존의 원천을 보라는 것입니다. 새나 백합화는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지만, 밤낮 염려하고 걱정하며 사는 사람보다 훨씬 아름답고 건강하고 밝게 삽니다. 그것은 결코 그들의 능력이나 본성, 자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존재의 기반, 생존의 기반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 들의 풀 한 포기가 자기 재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지극정성으로 돌보시고, 들풀 한 포기도 공들여 입히시는 분이 너희는 그것들보다 귀하지 않느냐고 하신 분이 우리를 오죽 잘 돌보시겠습니까? 여러분, 아버지가 계신데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우리가 죽도록 염려한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라고 하신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에게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조물주이실 뿐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다. 하물며 너희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염려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다음은 삶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이하입니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우리의 모든 염려는 사실상 무엇을 먹고, 마실까, 입을까 하는 의식주 문제에서 옵니다.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의식주 문제를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데서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주가 아니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주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올해도 앞으로도 의식주가 우리 삶의 최우선 과제인 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3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의식주를 삶의 최우선으로 삼고 사는 것은 이방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처럼 살 수 없습니다. 삶의 가치관을 바꿉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굳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며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평생 먹고 마시는 문제와 씨름하며 살다 죽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한다 해도 의식주 문제에 매어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삶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비로소 염려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루 단위로 살라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원래 하루 단위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새나 꽃들은 오직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새에게는 곳간이 없습니다. 오직 그날그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살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하루의 만나로 살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누구도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최대한 쌓아두어야 안도합니다. 우리는 탐욕의 화신으로 삽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며 감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염려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없어 염려합니까? 늘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염려합니다. 기독교는 초대교회 시대부터 청빈을 가장 아름다운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주님도 세례요한도 바울도 어거스틴도 프랜시스도 중세의 수많은 성자와 수도사들도 모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에겐 그런 삶이 어림도 없습니다. 이제는 가난이 불행이고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 들일 곳도 있건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두 벌 옷이나 신발도, 전대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제합시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합시다. 2,3세기 초대 기독교 문서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티테이오스>라는 호칭이 붙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초대교회 때는 믿는 자의 고유한 칭호로 쓰였습니다. 이 얼마나 적절하고 아름다운 대명사입니까? 2020년 새해에는 티테이오스로 삽시다. 아버지가 안 계십니까? 고아십니까? 날마다 무엇을 그렇게 염려하십니까? 염려, 근심, 걱정에서 놓여나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부디 새해에는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탐욕이나 불만이 아니라 자족과 감사로 사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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