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68
Extra Form
설교제목 새벽 빛
설교본문 호 6:3, 히 13:5-9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11-03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1103m.mp3

20191103m

호 6:3, 히 13:5-9

새벽 빛


(호 6:3, 개정)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히 13:5-9, 개정)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호세아를 다시 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개역성경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다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벽 빛 같은 분입니다. 새벽 빛이 무엇입니까? 본문은 일출을 뜻합니다. 햇빛이 일정하지 않다면, 지구 생태계가 타 없어졌거나 다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요즘 지구온난화로 남북극의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내리고, 그만큼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해마다 자연재해가 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프레온가스, 메탄가스 같은 것 때문이지, 태양이 뜨거워서 나타나는 재앙은 아닙니다. 태양은 언제나 일정합니다. 어느 날 새벽 태양이 안 떠오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흑암천지가 될 겁니다. 태양은 일정하게 떠올라 온 세상을 밝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본문도 보십시오. 13장 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사 그야말로 새벽 빛 같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 힘써 주님을 알자, 새벽 빛 같이 일정하고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새벽 빛 같으심을 알아야 하고 감사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라는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입니까? 구원 얻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이라는 게 구원의 원인이요 동기입니까? 아니면 구원의 결과요 열매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서 믿습니까, 아니면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자기가 회개하고 결단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근거를 자기 믿음에 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구원의 문제가 자꾸 흔들린다는 게 문제입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기 믿음처럼 구원이 날마다 흔들리는 겁니다. 우리가 잘 믿을 때는 구원의 기쁨, 감사한 마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늘 춤을 춥니다. 주님이 새벽 빛처럼 일정하시지,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구원도 항상 흔들리고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받지 못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전에 받은 구원을 상실한 것 같고, 지금 죽으면 천국도 못 갈 것 같습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드리지만, 구원은 우리 믿음의 대가나 보상이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열매요 결과고 보증이고 담보입니다. 사과나무라 해서 매년 사과가 잘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도 바로 그런 겁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구원이란 나무의 열매여서 그렇습니다. 구원은 불안정한 우리의 믿음이 그 동기나 원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근거한 것이기에 절대 흔들리거나 불안정하지 않고, 그야말로 새벽 빛처럼 영원히 동일하고 일정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믿음이나 결단보다 하나님의 뜻이고, 주님의 은혜고, 일방적인 하나님 주권에 의한 것임을 가장 잘 말씀해주는 곳이 로마서 5장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잘 믿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한없이 연약하고, 전혀 경건치 못할 때, 여전히 죄인일 때,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사 일방적으로 내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하시고 결정하셨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잘 믿고, 어떤 때는 제대로 믿지 못하지만, 열매라는 것은 그렇게 잘 열리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열매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구원의 열매이기에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못난 열매라도 그것이 구원의 담보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열매가 부실하다고 사과나무가 사과나무 아닌 게 아닙니다. 


물론 열매가 부실하거나 상품성이 떨어지면 과수원 주인의 마음이 쓰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안타깝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구원을 회수하시거나 취소하시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지, 우리 믿음의 대가나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갈팡질팡해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만큼은 절대 해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벽 빛처럼 어김없고, 일정하고 영원히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로 히브리서 13장이 말씀하는 주님이 일정하신 두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사랑입니다. 5절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무슨 이야기 끝에 이 말씀이 나옵니까? 돈 얘기하다가 나온 말씀입니다. 돈은 무자비하고 잔인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2002년에 나온 공공의 적이란 영화 기억하시지요? 공공의 적이 누구입니까? 자기 부모를 살해한 살인범입니까? 그 영화의 메시지는 악당이 아니라 돈이 바로 공공의 적입니다. 이것이 공공의 적 1편의 메시지입니다. 지난 달에 전주에서 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로또 1등 당첨자 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형이 동생을 마구 찔러 살해했습니다. 돈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동생이 서운한 말을 해서 홧김에 해친 겁니다. 언제나 돈이 주범입니다. 사람은 돈의 하수인입니다. 돈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우리를 비굴하게 하고, 속이게 하고, 배신하게 하고, 강도짓이나 살인을 저지르게도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평생 돈을 짝사랑하며 숭배하다가 죽습니다. 이게 사람의 일생입니다. 


창세기 35장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여러분, 어떻게 야곱의 가족이 이방 신상을 몸에 지니고 살았을까요? 이것은 야곱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섬깁니다만, 가운데 보좌에만 모실 뿐 좌우에는 권력, 돈, 명예를 모시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재주가 너무 좋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깁니다. 돈은 필요악입니다. 우리는 주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나를 끝까지 일정하게 새벽 빛처럼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과 경배의 대상은 주님뿐입니다. 


다음은 말씀입니다. 9절 상반절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다른 교훈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저런 교훈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풀이고 한낱 꽃입니다. 그래서 곧 시들고 떨어집니다.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가르침은 대단히 관대합니다. 결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 비해 기독교는 매우 배타적이고 독단적입니다. 사용하는 용어조차 살벌합니다. 다 죄인이라고 하고, 심판을 얘기 하고, 툭하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는 다 비슷하니까 너나 나나 모두 진품으로 간주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관대한 게 아니라 무책임한 것입니다. 현미경을 들이대서라도 진품과 가짜를 제대로 가려야 옳습니다. 대충 넘어가자는 게 관대한 것이고, 제대로 가리자는 게 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답과 오답을 가리자는 게 어떻게 독선입니까? 비슷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진품은 하나입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이 선을 추구하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자는 것이니 더는 짝퉁이니 시비하지 말고 종교다원주의로 가자는 게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히 가짜와 짝퉁을 골라내서 진품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배타성입니다.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왜 오직 기독교만 진리고 진품이고 명품입니까?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훈들은 다 시들고 맙니다. 공자님 부처님 모하메드 다 거대한 무덤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지금도 새벽 빛처럼 생생하게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만 진리라는 것입니다. 


부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사랑, 새벽 빛 같이 일정한 주님의 말씀으로 늘 생명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