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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고백과 확신
설교본문 삼상 7:12-1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10-20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1020m.mp3

20191020m

삼상 7:12-14

고백과 확신


(삼상 7:12-14, 개정)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고사성어가 무엇입니까? 옛날 고사에서 유래된 삶의 지혜나 교훈을 뜻하는 짧은 글귀입니다. 한자성어라고도 합니다. 사자성어도 마찬가집니다. 네 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교훈적 말이 사자성어입니다. 촌철살인, 타산지석, 유비무환, 십시일반, 일석이조, 신토불이, 오비이락 등이 사자성어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고전뿐 아니라 성경에도 고사성어가 많습니다. 성경 성어들은 주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찬양으로, 믿는 자들의 신념을 표현할 때 사용되어 왔습니다. 


본문 12절의 에벤에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고사성어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입니다. 에벤에셀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세운 감사의 돌비석이 에벤에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사의 대혼란기였습니다. 신정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였습니다. 지도력에도 공백이 생기고,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블레셋이 침공해 약탈을 일삼았고, 심지어 법궤까지 빼앗긴 상태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을 이끌어온 엘리 선지자가 죽었습니다.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의 후계로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자란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러면서부터 사정이 하나둘 수습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블레셋 군대를 굴복시켜 다시는 이스라엘 영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사무엘이 사는 동안에는 그 어떤 도발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평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무엘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감사의 돌비석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지난 10개월을 되돌아보며 주께서 우리 가정을 도우셨다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에벤에셀의 기념비를 여러분 마음속에 세울 용의가 있으십니까? 이사야서에서는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돕겠다고 합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 오른손으로 붙드시고 두려워말라고 격려하지 않으셨다면 올해도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물론 아쉬움이 크신 분들, 항변하고 싶은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복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가만히 보고만 계신 것이 복입니까? 더 큰 상처를 입을 게 뻔한데 우리를 못 본 체 하는 것이 은혜입니까? 때려서라도 깨닫게 하는 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에벤에셀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고백할 때 적들이 굴복합니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습니다. 그리고 평화가 보장됩니다. 


에벤에셀 다음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경의 고사성어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는 고백과 확신이 임마누엘입니다. 에벤에셀이 지난 날 함께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임마누엘은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어입니다. 


임마누엘을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훔쳐서 망명길에 오른 야곱이 들판에서 노숙합니다. 거기서 그는 꿈을 꿉니다.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성경에서 임마누엘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없을 겁니다. 그날 밤 임마누엘의 사다리는 야곱이 하나님을 뵈려고 놓은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려고 내리신 사다리입니다. 사다리는 올라갈 때뿐만 아니라 내려올 때도 사용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기 28장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자기는 이제 혈혈단신이고 우주의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야곱의 그 외로운 망명길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어디로 가든지 지켜주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그 후 30년간 객지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임을 확증하셨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집니다. 모세는 처음 하나님이 부르실 때 완강히 저항합니다. 자기는 말을 잘 못한다고 하면서 버텼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너와 함께하겠다고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모세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모세이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도 임마누엘을 약속합니다. 여호수아 1장 5절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23편 4절입니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임마누엘의 진수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늘 섭섭함이 있습니다. 날벼락을 겪을 때 하나님이 내 삶을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날벼락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무리 가혹한 시련이라 해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결국은 내가 이깁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생생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깊이 깨달읍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성경의 고사성어는 여호와 이레입니다. 에벤에셀은 지난 날의 감사, 임마누엘은 현재라면, 여호와 이레는 내일에 대한 희망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2장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마디로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그의 생애는 여호와 이레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목적지도 없이 고향을 떠났는데도 하나님은 가나안을 예비해두셨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는데도 하나님은 이삭을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소중한 것이 이삭입니다. 우리 각자도 다 이삭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자기 목숨보다 10배 100배는 더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일말의 저항도 반항이나 항변도 없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산에 제단을 쌓고 아들을 결박해 제단에 눕힌 후 칼을 빼듭니다. 아브라함이 그때 이삭을 죽였습니까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은 show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나를 말릴 것을 생각하고 포옴만 잡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심장 같은 아들을 잡아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살려줄 것을 믿었기에 거침없이 아들을 잡겠다며 덤볐습니다. 실제로 목을 따는 데까지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결단과 믿음에서는 이미 이삭을 죽인 것입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도 굳이 칼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이삭의 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는 우리의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애정에 늘 목말라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삭을 바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반대급부인 여호와 이레의 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삭 바치는 대목을 오해해 실제 아들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포옴만 잡습니다. 부디 연기만 하지 맙시다. 시늉만 내지 맙시다. 헐리우드 액션만 연출하지 맙시다. 실제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리고 칼로 목을 따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상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네 후손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같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올해는 여러분의 이삭을 헌상하여 여호와 이레라는 복을 현실적으로 누리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