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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너희여!
설교본문 사 46:3-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9-29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929m.mp3

20190929m

사 46:3-5

너희여!


(사 46:3-5, 개정)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3절에서 집이여, 남은 자여, 너희여 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향해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오늘날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하나만 잘 붙잡고 살아도, 최소한 이 약속 하나만 놓치지 않고 살아도 절대 망하거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3절에 배에서 태어나고, 태에서 남으로부터라는 말씀과 4절의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전적으로 책임을 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를 안고 가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사랑하겠노라는 약속입니다. 찬송가 393장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없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신실하고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해주셨는데, 요즘은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버렸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은 내 감정, 내 믿음이 변한 것입니다. 달이 보름일 때 저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십시오. 파문이 일어서 연못에 비친 달이 산산조각 납니다. 하지만 하늘을 보면 밝고 큰 보름달이 떠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실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나를 안고 품고 가십니다. 우리는 악해서 곧잘 내 잘못을 주님께 뒤집어씌웁니다. 우리가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쁜 짓을 할 때 신앙 양심에 걸리니 기도합니다만, 결국 죄를 짓고 맙니다. 그런 후 제정신이 돌아오면 분명히 기도했다고 주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때로는 이토록 교활하게 내 잘못을 주님께 전가하며 원망해도 주님은 절대 네가 틀렸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당신 품에 안고 가십니다. 우리가 제바람에 회의, 원망, 낙심, 포기하지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나를 주님 품에서 내쫓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주님은 분명히 태에서부터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안고 가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한번 하신다고 하면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다음은 3절 하반절입니다.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절에서도 내가 지었으니 내가 너를 업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안전하고 평안하게 지켜주겠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다 엄마, 누나, 언니 등에 업혀 자랐습니다. 울다가도 등에 업히면 울음을 그치고, 따뜻한 등에서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업고 가시겠다고 합니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이라는 작자 미상의 시 아시지요? 오늘이 9월 29일이니 한 해의 3/4이 다 지나갔습니다. 지난 9개월을 뒤돌아보십시오. 모래 위에 주님과 나, 두 사람 발자국이 9월말까지 잘 이어져 있지요?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군데군데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분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일 때는 내가 가장 힘들어 할 때입니다. 내가 아팠을 때, 사업이 잘 안 되었을 때,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퍼할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느 때보다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와 격려가 절실했던 순간인데 그때마다 주님이 내 곁에 안 계셨던 겁니다.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섭섭한 마음으로 주님이 왜 그때 제 곁을 떠났습니까? 하며 항의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올해도 네 곁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저 모래 위의 한 사람의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라고 하십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 하셔서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혼자 난리입니다. 하루에 12번도 더 내가 주님을 떠났다가 돌아왔다가 합니다. 주님은 나를 언제나 품에 안고 등에 업고 가십니다. 내가 허무하게 팥죽 한 그릇에 내 영혼을 팔지,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절대 우리를 잃거나 놓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사를 부러워합니다만, 주님께는 우리가 주연이지 천사는 엑스트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천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어서 늘 우리를 업어서 키우지만, 주님은 천사를 업어주시지 않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종들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도리어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말씀은 빈말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날개는 없지만, 지위나 신분으로 말하면 우리가 천사보다 훨씬 높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3절을 보면 심지어 우리가 천사를 심판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 천사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천사보다 우리가 더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바울과 주님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십니다. 우리와 주님은 하나가 되어서 주님이 우리가 당하는 아픔을 당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다 엄살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주리고 목마르고 시달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우리를 당신 등에 업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것을 대신 당하며 가시겠다는 겁니다. 우리를 등에 업고 가시며 온몸으로 우리가 당할 것들을 막아주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4절 하반절입니다. “구하여 내리라” 이 말씀은 반드시 너를 책임지고 구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자꾸만 흔들릴까요? 왜 어떤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전혀 아닌 것 같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알량한 내 믿음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정말 못 믿을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간사합니까? 기분과 감정에 따라, 날씨 따라 춤추는 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우리에게 두는 한, 우리의 구원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믿을 때는 괜찮은데 낙심할 때는 우리 믿음이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에 따라 하나님이 구원을 줬다 뺐지 않습니다. 구원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태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를 안고 업고 가시는 주님의 그 사랑에 근거하기에 우리의 구원은 절대 왔다갔다하지 않습니다. 부모자식 관계는 법적 관계라기보다 운명적 관계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자식보다 더 본질적인 영적 관계입니다. 칼도 사망도 천사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제바람에 강해졌다 약해졌다 버림받았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을 붙잡고 간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때로 주님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은 여전히 우리 손을 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여전히 안전합니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아무리 구원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죄를 범하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개신교에서도 알미니안 웨슬리 계통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어떤 죄도 주님이 이룩하신 구원을 무효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룩하신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절대 철회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아무리 흉악한 죄를 범해도 그때마다 주님이 하나님 앞에 나서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떠한 보장도 없습니다. 우리 삶에는 변수와 복병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천지가 뒤집혀도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내가 너를 구해 내리라는 말씀이 우리 구원에 대한 주님의 신실한 약속이자 보장입니다. 주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모든 시험을 이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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