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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양과 이리
설교본문 마 10:16-3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8-11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811m.mp3

20190811m

마 10:16-31

양과 이리


(마 10:16-31, 개정)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주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현실주의자셨습니까? 이상주의자셨습니까? 아무래도 주님은 이상주의에 가깝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은 공생애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주님의 제1성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는 이렇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러니까 주님은 현실주의자라기보다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산상보훈입니다. 누가 네 오른 빰을 치면 왼뺨도 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고,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고,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게 산상수훈입니다. 어떻습니까? 현실성이 있습니까? 이것은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결코 맹목적인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무섭도록 냉철한 현실주의자셨습니다. 본문에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냉정합니까? 주님은 세상을 양의 천적인 이리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대한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아닌 현실을 그대로 꿰뚫어 보셨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통하는 정글입니다. 국제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나라가 눈의 불을 켜고 서로 약점을 공격하며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려는 이리들의 정글이 국제사회입니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북한도 우리를 위기에 빠트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정말 다 이리떼들입니다. 최근에 와서는 각 국이 이리의 본색, 이리의 이빨과 발톱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저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리가 득실대는 살벌한 세상 한복판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현실도피를 명하시지 않고 세상 한복판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당부하신 격려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주님의 비장한 말씀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는 인간을 기만했습니다. 사람 원죄의 주범이 뱀입니다. 그때부터 뱀은 지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날마다 뱀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처에 날뛰는 이리의 타겟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뱀 같은 지혜와 투명한 영성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워야 교활한 이리들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그다지 지혜롭게 이리들을 상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뱀 같은 고도의 지혜보다는 감정을 앞세우고, 선동적이고 원색적입니다. 광복한 지 74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본과의 악연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뱀 같은 지혜는 안 보이고 오히려 원색적인 대결만 벌이고 있습니다. 뱀 같은 지혜, 성령의 신령한 지혜가 우리나라를 주변의 모든 이리떼로부터 지키고 극복하고 이기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비둘기 같은 순결을 주문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비둘기가 실제 순결의 상징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령을 비둘기로 표현합니다. 비둘기가 순결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당부는 무슨 뜻일까요? 세상에 나가 살 때 이리 같은 세상과 함부로 수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정글 한복판에서 살망정 언제나 성도답게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서의 순결,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팔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두렵다고 함부로 백기투항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비둘기가 순결을 지키듯이 이리 앞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로 자신의 영혼과 우리나라와 민족을 붙잡고 지켜나가기를 희망합니다. 


17절 상반절에서 주님은 ‘사람을 삼가라’고 합니다. 사람을 삼가라는 말은 사람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사람을 의심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시며 이런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주님이라면 사람을 무조건 믿어라, 사람을 신뢰하라, 선입견을 갖고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고 하셨을텐데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곧 이리요, 사람이 사나운 짐승이기에 함부로 사람을 믿거나 경계심을 늦추면 당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섭도록 투철한 주님의 현실감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1호가 사람입니다. 이리, 곧 사람이 우리의 천적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이리입니다. 언제나 사람이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배신하고 발목을 잡습니다. 사람이 나를 법정에 세우고, 사람이 내게 채찍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일단 의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도 해야 하지만 반드시 경계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맹목적 낙관주의는 금물입니다. 주님이 누구보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분이셨지만 제자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리가 다 양의 탈을 쓰고 발톱을 감추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리가 언제든지 본색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26, 31절). 분명히 누구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들여보내는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두려워말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습니다. 세상이 두렵고 사람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더 크고 무서운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아직도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작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움을 불신앙의 소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두려워한다면 육신만 죽이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상대화 할 수 있습니다. 세상 한복판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은 이리보다 더 크고 강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각종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두려움, 북한의 탄도 미사일에 대한 두려움, 안보상의 두려움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모두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잠시 지방에 있는 한 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밤 2시쯤에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데 두려워 말라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들었다고 합니다. 살펴보니 아무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주변을 살피니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두려워 말라는 소리가 들릴 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심을 느꼈을 때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교회 벽을 주먹으로 치면 뻥 뚫릴 것 같았다고 합니다. 이후 단숨에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덤벼도 한 방에 제압할 수 있는 분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은 마귀가 줍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대신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여서 인간의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도 남습니다. 일본이 위협하는 경제보복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성령의 능력을 우리가 다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경제력보다, 핵폭탄보다 더 크고 강력한 하나님의 다이너마이트가 있습니다. 우리 안의 두려움을 날려버립시다. 이리가 우글대는 세상일지라도 성령의 두나미스를 갖고 살면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모두가 두려움과 세상이 주는 각종 공포를 이기고 주님의 자녀답게 담대히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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