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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역사에 대하여
설교본문 계 1: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7-28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728m.mp3

20190728m

계 1:8

역사에 대하여


(계 1:8, 개정)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역사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 우주사가 다 급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도 빠르지만 그 내용과 질도 과격할 정도로 큽니다. 오늘은 역사에 관한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역사 얘기가 필요한가를 묻습니다. 꼭 필요합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여러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현대 신학자 가운데 유명한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가 있습니다. 그분은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라는 말로 유명해진 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역사가 하나님 계시의 최대 장이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가장 큰 도구라는 것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사건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 이후 교회사 같은 구속사뿐 아니라 인류사와 자연사와 같은 세속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가리키는 구속사와 세계사를 합쳐서 보편사(Universalgeschichte)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 보편사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역사에 무관심하고 역사를 도외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이 시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가장 큰 장이 보편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 역사를 도외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으로 역사를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역사적 아픔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이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고 계신 것일까? 이것을 탐색하고 고민하며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노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주님은 분주하게 일 했던 마르다보다 오히려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를 더 높이 평가하셨기에 우리는 일보다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역사의식, 역사 감각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역사적 감수성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평소 같으면 마리아가 이상합니다. 손님 맞기에 분주한 마르다가 상식적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마지막 방문의 때는 다릅니다. 당시 주님의 말씀은 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리아와는 달리 마르다는 때에 대한 감각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리아가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역사 감각 뛰어난 영적 예지력을 높이 사시며 마리아처럼 카이로스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에서 그 주체는 누구입니까? 인간이 주체입니까? 인간이 자기 재주로 역사를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요 진정한 주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간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시간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가 역사의 시원, 시간의 기원입니다. 하나님이 시간 안의 존재인 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먼저 시간,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태초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말할 때 우주 만물을 생각하는데 실제는 역사, 시간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말이 원초적인 시간 안에서, 막 창조한 역사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의 시간을 좀 더 세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후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천지만물이 창조주의 것이듯이 시간과 역사도 창조주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는 처음과 마지막, 창조와 종말, 역사의 시작과 심판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사니 실존사니 하면서 오직 인간 중심의 역사만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을 역사의 주역으로 세우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란 뜻은 아닙니다. 주연배우도 감독의 연출에 따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현대 사상, 특히 실존주의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임을 역설합니다.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방향과 기록과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는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고민합니다. 대체 이 사건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둔감하고 영적 감각이 무뎌서 그렇지 하찮은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반 푼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철저하고 세심한지를 말씀합니다. 그 무엇도 의미 없는 사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 그것을 듣고 봅니다. 


사람들은 역사가 발전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역사 낙관주의입니다. 역사는 명제와 반명제가 서로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 종합명제로 나아간다는 것, 역사가 유토피아로 간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역사관입니다. 헤겔이 주장한 역사 이론입니다. 유물론자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헤겔은 신학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역사를 빗대어 자주 말했습니다. 반면에 동양의 역사관은 영원한 회귀입니다. 불교와 힌두교가 이를 따릅니다. 이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정태적인 역사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시작에서 끝으로, 알파에서 오메가로, 창조에서 종말로 나아가기에 대단히 역동적이고 진취적이고 전투적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헤겔철학이나 유물론자들의 사관처럼 그것을 발전이나 진화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성서적 사관은 역사 낙관적이지 않고 종말론적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역사가 종말에 이르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늘 종말을 준비하고 대비하여 긴장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관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적 관점이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반영됩니까? 우선 물질적 삶입니다. 역사 발전 사관을 지닌 사람은 철저히 물질적입니다. 그들은 오직 육적 삶에만 몰두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믿지 않았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오직 물질적 삶만 탐닉했습니다.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었던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멸망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를 마무리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재림할 때, 역사의 종말이 임할 때, 그 옛날 노아 때, 롯의 때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종말을 비웃으며 제멋대로 먹고 마시며 장가들고 시집 가다가 마지막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내세를 부정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오직 현세만을 전부로 알고 현세에 목을 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임을 부정하고, 심판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내세를 인정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안중에는 인간 중심의 현세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왜 향락과 쾌락에 빠질까요? 그들은 이생이 전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 살아 있을 때 즐기자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현세 이익이나 향락을 위해 내세를 팔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세를 위해 현세의 고난을 견뎌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내세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이라도 내 심장이 멎으면 그 순간부터 내세는 내게 준엄한 현실이 됩니다. 그래서 내세야말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데 있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부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되심을 확신하고 언제나 겸손하게, 그리고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종말을 성실히 준비하며 살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