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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부자와 거지
설교본문 눅 16:19-3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6-16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616m.mp3

20190616m

눅 16:19-31

부자와 거지


(눅 16:19-31, 개정)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기생충 보셨습니까?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부자와 거지입니다. 저는 기생충이라는 영화도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고발하고 풍자한 영화로 이해했습니다. 본문은 실화가 아니라 주님의 창작입니다. 주님이 쓰신 2막짜리 시나리오입니다. 그런데 작품 전체가 부자와 거지,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이라는 대비 구두로 이뤄져 있습니다. 영화는 지상과 지하, 유망한 IT 기업 CEO와 백수, 금수저와 흙수저, 명문대생과 재수생, 사모님과 가정부 등의 극단한 대비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고발합니다. 기생충의 무대는 지상과 반지하 또는 지하입니다. 그런데 반해 본문의 무대는 훨씬 거창합니다. 이생과 내생입니다. 제1막은 이생이고, 2막은 내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서로가 시차만 다를 뿐입니다. 시차가 반드시 나이순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음이나 사후 세계를 얘기하면 누구나 불편해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삶의 흥을 깬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집니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을 간다 해도 사후 세계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지를 본인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세에 대한 화제가 달갑지 않고 두려움과 부담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궁극 목표는 언제나 가나안입니다. 우리의 최후 목적지도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 영원한 가나안,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현재 극장가에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천국에 이른다는 긴 순례 여정을 다룬 작품입니다. 저는 기생충보다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라는 영화를 추천합니다.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크리스천이 바로 우리입니다. 영국의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입니다. 링컨도 성경 다음으로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절대 교양이나 현대인의 문화생활 차원에서 신앙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돈 잘 벌고 자식 잘 되라고 예수 믿지 않습니다. 천국 가려고 예수 믿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한 부자가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는 늘 최고급 겉옷에 속옷으로는 극세사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호화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거지도 한 사람 등장합니다. 거지가 이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몸은 온통 피부병에 걸렸고 부잣집 대문 앞에 널부러져 있다는 것으로 보아 중증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잣집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인 건 오직 개뿐이었습니다. 개가 그의 헌 데를 핥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자의 호화스런 삶고 병든 거지의 비참한 삶도 겨로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둘 다 죽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하는데, 거지는 그냥 죽었다고만 합니다. 병든 거지에다 남의 집 대문간에서 객사했는데 무슨 장례 절차를 밟았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연극으로 치면 제1막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와 거지의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그린 겁니다. 


2막은 내세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의 처지와 운명이 뒤바뀌었습니다. 거지는 고독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천사들이 그의 영혼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안내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며칠씩 애도하고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른 부자의 영혼은 음부에 처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입체적으로 두 장소를 극명히 대조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유대인들이 흔히 낙원, 천국을 가리킵니다. 부자가 간 음부는 하데스입니다. 지옥입니다. 다른 말로는 게헨나입니다. 하데스는 음부로, 게헨나는 지옥으로 흔히 번역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 끝을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치명적입니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든 불타는 하데스든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후 세계의 시작입니다. 우리 가운데 죽어 본 사람은 없지만, 성경은 절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사후 세계를 잘 알려주는 게 꿈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을 중시합니다. 칼 융은 꿈의 내용보다는 그 현상 자체를 중시합니다. 꿈이란 사후 세계에 대한 깊은 종교적 암시(상징)라는 겁니다. 우리가 잠 자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실제는 잠자는 사람이 꿈속에서 현실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오묘한 세계를 헤매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고향집에도 가고, 돌아가신 분도 만나고, 하룻밤에 천리만리를 가기도 합니다. 몸은 침대에 있는데 의식은 시공간을 초월해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잠재의식을 모릅니다. 죽은 사람도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었으니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 매장도 하고 화장도 하지만 그것은 시신만 그렇게 처리할 뿐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꿈속 세계처럼 천사들의 안내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든가, 아니면 저승사자에 이끌려 음부로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깁니다. 부자와 거지는 어째서 그들의 사후 운명이 아브라함의 품과 하데스로 결정되었느냐는 겁니다. 거지는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든 노숙자로 살았기에 천국 가고, 부자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기에 지옥 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지는 왜 천국을 갔을까요?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창작인데 다 주님이 뜻하신 바가 있어 그렇게 작명하신 겁니다. 주님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영적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사로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님이 그렇게 작명하신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 없던 가난한 병자였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았던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음부로 갔을까요? 부자가 부요하게 살았다 해서 지옥 간 것은 아닙니다. 그가 뇌물을 받거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지옥에서 처절하게 고통당합니다. 물 한 방울만 달라는 그의 호소는 거지 나사로의 이생에서의 삶보다 훨씬 비참합니다. 27절에 나오는 부자와 아브라함간의 대화에서 그의 지옥행 이유가 밝혀집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기는 비록 지옥에 왔지만, 자기 형제들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로 하여금 이 사후 세계를 증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이뤄진 성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부자 역시도 다른 형제들처럼 생전에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이 있음에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더라면, 대문간의 거지 나사로를 그렇게까지 방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 그는 오직 자신을 믿고 살았고, 그 많은 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았다기보다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형제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세상에 살 때 회개 없이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그가 형제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해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의 거지와 이름이 같은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있습니다. 그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왔을 때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기는커녕 주님과 함께 살아난 나사로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데스는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입니다. 끔찍한 것은 하데스가 불에 타서 죽거나 없어지지는 않으면서 영원히 불에 타는 고통이 계속 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얼마나 고통이 극심했으면 부자가 나사로의 손 끝 물 한 방울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 한 방울을 간청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은 너와 나 사이에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왕래 불가하다고 합니다. 즉 이것은 누구도 사후의 운명은 수정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후 운명의 고정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능성이나 기회는 오직 살아있을 때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부자를 보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형제들을 회개시켜 달라고 한 것을 보아 그가 뒤늦게나마 구원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면서 호소한 것이 하나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데스에서는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부자의 참혹한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 살아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사랑하고 자선하고 기도하고 믿으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관리해야 그의 운명이 복되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진정한 소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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