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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무로부터의 창조
설교본문 창 1:1-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6-02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602m.mp3

20190602m 

창 1:1-5

무로부터의 창조


(창 1:1-5, 개정)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기독교 진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학문을 교의학(dogmatics)이라고 합니다. 교의학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가 보통 창조론이고, 가장 마지막에 종말론을 다룹니다. 성경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입니다. 오늘은 환경주일을 맞아 창조론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창조론의 기본 명제는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라틴말로는 이것을 크레아치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입니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론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가르친 교리입니다. 그러면 무로부터의 창조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하나님은 첫날에 빛부터 창조하셨습니다. 3절 이하입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기 전에는 어떤 상태여야 맞습니까? 완벽한 무여야 합니다. 무로부터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 앞에 2절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혼돈한 땅, 공허, 흑암, 깊음, 수면이 있습니다. 있을 것 다 있습니다. 무(無)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요?


어거스틴은 이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라톤의 절대 무(우크온)와 상대 무(메온) 개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절대 무로부터 곧장 빛으로 가신 게 아니라 일단 상대 무를 거쳐서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장 1절 이전의 절대 무에서 2절의 상대 무를 창조하시고, 거기서 다시 3절 이하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즉 2절은 상대 무의 상태입니다. 거기서 엿새에 걸쳐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절대 무 –> 상대 무 –> 가시적 피조 세계의 순서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주석입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어거스틴은 왜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때문입니다. 우주와 역사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이 명제가 꼭 필요합니다. 원래 아무것도 없고 그야말로 우크온이었기에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내 자식도, 내 심장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지시에 따라 우리가 관리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인간에게 맡기시며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연에 대한 주권이나 소유권을 이양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잘 보살피고 지키라는 관리권을 위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자연에 대한 청지기직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과 환경을 보호해야지 폭군이 되거나 주인 행세를 하며 제멋대로 파괴하면 안 됩니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에서 이 세상 만물에 대한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신실한 청지기가 되는 게 옳습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중요한 것은 인간의 품성 때문입니다. 윤회설이나 힌두교에서는 당연히 무가 아니라 전생에서 현재가 왔습니다. 업보에 따라 돌고 도는 게 중생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전생이 아니라 절대 무를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 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에 대한 향수, 허무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연어나 코끼리만 귀소 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원적지에 대한 강렬한 향수가 있습니다. 명절마다 이뤄지는 민족 대이동은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라 모천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회귀 본능의 발동입니다. 인간에게는 불안이라는 심리적 정서가 있습니다. 불안이 무서운 것은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대상만 제거하는 해소됩니다. 하지만 불안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불안을 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불안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원초적인 허무가 우리를 유혹하고 위협하는 데서 오는 정서적, 정신적 동요가 불안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허무에서 왔기 때문에 허무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허무의 위협에도 시달립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불안이 만성이 되면 우울증이 되고, 그게 더 심하면 허무에 투신하게 되는데 그게 자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사람이 허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허무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 잠재적 자살자들입니다. 누구나 자살할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으로 확대되면 누구나 자살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허무에 대한 향수병입니다. 2절을 다시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 공허, 흑암, 깊음에 빠지는 게 우울증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살률이 OECD에서 압도적 1위입니다. OECD 35개 국 평균 자살률이 10만 명당 11명인데 우리나라는 약 25명입니다. 2위가 슬로베니아인데 거기는 약 18명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1위 자리를 내줄 수 없습니다. 4위 일본도 약 16명입니다. 미국은 약 13명, 독일은 약 10명, 터키는 약 2명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40명 이상이 자살합니다. 앞으로도 1위 자리는 우리나라가 차지할 것입니다. 10년 이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자살의 주범인 불안과 우울증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는 허무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태초에 창조하신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도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대한 향수입니다. 그게 바로 종교성입니다. 종교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다 그 사람 나름대로 무언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사람은 갖고 있습니다. 입양아들을 보십시오. 커서 부모를 찾고, 고국을 찾아옵니다. 부모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 때문입니다. 미신, 우상은 다 아버지를 찾다가 사이비, 가짜, 짝퉁을 만난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는 인간을 <경계선상의 존재>라고 합니다. 인간은 절대 무에서 왔기에 허무에도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존재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허무에 기울면 불안에 시달리게 되고, 존재로 기울면 불안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1장에서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절대 평안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의 허무와 불안과 우울증은 아버지 품으로 복귀하기 전에는 절대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불안은 존재론적 병입니다. 이것은 일에 몰두하고 심지어 마약을 한다고 치유되는 병이 아닙니다. 무조건 인생의 원적지인 아버지 품으로 복귀해야 치유됩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치유책입니다. 부디 무로부터 왔다는 창조론의 비밀을 깊이 깨달아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 품에 안김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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