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Form
설교제목 주님을 따른다는 것
설교본문 눅 9:57-62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5-26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526m.mp3

20190526m

눅 9:57-62

주님을 따른다는 것


(눅 9:57-62, 개정)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히틀러에게 저항하다 1945년에 39세의 나이로 처형당합니다. 올해가 그의 순교 74주기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나를 따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해석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덕목을 제시한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제자(Schueler)라는 말 대신에 <뒤따르는 자>(Nachfolge)라는 말을 씁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제자라는 말에 내성이 생기고 타성에 젖어 좀 더 역동적인 <뒤따르는 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주님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난 5개월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를 따르라(folge mir nach)는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본문에는 주님의 이 말씀에 응답한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을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적극적입니다. 사실 주님이 그에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자원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57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이것은 대단한 열심이고 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소극적이고 미온적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주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부푼 가슴을 안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의 열정에 주님이 왜 찬물을 끼얹으셨을까요? 주님은 그 사람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와 같습니다. 말은 근사하지만 그런 사람의 함정은 의례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런 사람은 순수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자기 생각에 조금만 어긋나면 금방 시험에 듭니다. 쉽게 결단하지만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냉정하게 그의 현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것은 절대 네 생각처럼 꿈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단하고 가난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에게 여우는 교활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암몬 족속을 여우라 불렀고, 주님도 헤롯왕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새도 침략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에돔과 로마를 새떼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우와 새는 유대인에게 경계와 미움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에게도 굴과 둥지가 보장되는데 나는 그것조차 없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 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부정적 말씀을 듣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본문이 왜 이런 유형의 사람을 가장 먼저 언급했을까요? 그런 사람이 가장 많기 때문입니다. 오직 행복, 축복, 성공 같은 아름다운 것만 기대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케이스가 가장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실패한다는 게 본문의 엄중한 경계이고 예리한 지적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날아가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만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변변히 없는 분이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처럼 어떤 고난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옳다는 것입니다. 축복만 바라고 따르면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 여기에 걸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도 축복만 기대하지 우리 가운데 누가 고난, 아픔, 희생을 각오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겠습니까? 진지하게 생각해봅시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자세와 각오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제자의 모습인지를 말씀 앞에서 고민해봅시다.


두 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의 따르라는 말씀에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사람입니다. 59절 하반절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인륜대사 가운데 아버지 장례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큰일부터 치르고 따르겠다고 하는 이 사람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모범생입니다. 


주님도 그 사람의 말에 기꺼이 동의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0절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주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장례는 유대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부친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장례하는 일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고 네가 해야 할 일에 매진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비정한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게 도리입니다. 하지만 부친의 장례마저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만큼은 절대 우선순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부친 장례가 우선인 사람은 아직 주님을 따르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주님을 따르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인생의 제1순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불편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요구입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 이하입니다.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아버지와 배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것이 맞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혹 부친 장례 때문에 주님 따르는 일을 그 이후로 미루지는 않았습니까? 주님 따르는 순위와 자세를 다시 한 번 냉정하게 확인해 봅시다. 


마지막 케이스입니다. 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겠다고 응답하고 나섭니다. 그는 셋 중에 그래도 가장 바람직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주님께 다만 양해를 구합니다. 잠깐 집에 들러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겁니다. 단 5분, 10분이면 된다고 합니다. 당장 따르겠지만 가는 길에 잠시 집에 들러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하는데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손에 쟁기는 잡고 있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기 때문에 밭을 제대로 갈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쟁기질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쟁기질은 앞만 바라봐도 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쟁기질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면 제대로 밭을 갈지 못합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앞만 보고 부단히 나아가야했는데, 그들은 애굽생활을 그리워하고 거기서 먹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뒤돌아보다가 낙오했습니다. 아간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주님을 뒤따르는 일은 집중해야 하고, 조금도 지체하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는 인생의 가장 긴박하고 긴급한 종말론적 과제입니다. 세 사람 모두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들은 주님께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부친 장례나 작별인사도 안 되냐고 합니다. 사람 도리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면 인간적으로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과감히 미련을 버리는 게 옳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인간의 어느 과제보다 긴박한 것이고 집중력을 빼앗기면 안 되는 소중하고 절대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세상을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집중합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성도, 주님 보시기에 신실한 제자가 됩시다.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