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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마리아야!
설교본문 요 20:11-1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4-21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421m.mp3

20190421m

요 20:11-18

마리아야!


(요 20:11-18, 개정)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우리는 성탄절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인사하는데, 부활절 때는 그런 인사를 안 했던 것 같습니다. 서구 교회들은 부활절에 해피 이스터라고 하면서 인사합니다. 우리도 인사하고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해피 이스터!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원초의 부활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 상반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이때가 바로 오늘 새벽입니다. 부활절 당일 이른 새벽 어둔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주님에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 주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그들이 현장에 도착하니 거기에 주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웁니다. 원어로 보면 그녀는 처절하게 슬피 울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헷갈립니다. 주님의 시신이 울었다니 그렇다면 주님의 시신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원래는 시신이 그대로 있으면 슬퍼하는 게 맞고 시신이 없으면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지금 슬피 울고 있습니다. 본문 13, 15절을 보면 천사가 왜 우느냐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어째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책망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없어야 정답인데,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없다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주님을 모시고 다니던 주님의 최측근도 부활에 대한 기대나 관심,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시신을 보러갔지 부활하신 주님을 뵈러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보자 기뻐하기보다는 근심하고 슬퍼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형제들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합니다. 여인들이 급히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지만, 그들은 헛소리로 듣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놀라운 인물이 있습니다. 아득한 구약에 등장하는 부활 신앙의 원조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니까 그러려니 해서 그렇지 어떻게 아비란 사람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 손으로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수 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아무 저항도 없습니까? 어떻게 아비가 아들 목에 실제로 칼을 들이댑니까? 저는 창세기 22장만 있고, 신약 히브리서 11장이 없었다면 아직도 아브라함 때문에 시험에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믿음은 히브리서 11장 19절에서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광신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다시 살려주실 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9절 하반절입니다.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얼마나 위대한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통쾌한 부활 신앙의 승리입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자 부활 신앙의 사표요 원조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절대 체념하거나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잡아 바쳐도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반열에 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이 얼마나 복 있고 소망 있습니까? 하나님도 당신의 독생자를 처절한 십자가의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하나님인들 왜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에 대한 대전제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그러면 부활이 무엇입니까? 나사로처럼,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회당장 야이로의 딸처럼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생이나 회생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부활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여기서 마지막 나팔은 이 세상 종말에 있을 주님 재림의 나팔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주님 재림의 나팔이 울리는 순간 우리가 다 오늘 새벽 부활하신 주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변화가 중요합니다. 신령한 몸, 소위 부활체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육체는 소모품입니다. 반드시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면서 변화되고, 그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은 산 채로 변화됩니다. 이어지는 52절 이하입니다.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영원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때는 누구도 신체적 콤플렉스를 느낄 일이 없습니다. 그때는 더는 루저가 없습니다. 장애인도 없습니다. 화장한 사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에서 부활을 꽃씨와 꽃으로 비유했습니다. 때 낀 손톱처럼 생긴 코스모스씨와 코스모스 꽃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렇게 환상적으로 변합니다. 쥐똥처럼 생긴 나팔꽃씨와 해맑은 나팔꽃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은 그런 변화입니다. 계란과 병아리를 비교해 보십시오. 배추벌레와 노랑나비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렇게 변합니다. 볼품없는 씨가 땅속에 묻혀 썩으면 거기에서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듯이 부활도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신비롭고 신성하게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입니다.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빌립보서 3장 21절입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은 우리의 몸뿐만 변화시키는 게 아닙니다. 한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기발한 질문을 합니다. 한 여인이 7형제의 맏이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맏이가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관습대로 둘째가 그 여인과 부부로 삽니다. 그도 역시 자식 없이 죽습니다. 그렇게 7형제가 다 그 여인과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훗날 부활해서 과연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라고 주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너무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부활 때는 시집 장가 안 가고 하늘의 천사와 같아진다고 했습니다. 부활 때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떤 아픔도 상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부활 때는 자연도 변합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그때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굴고, 표범과 염소가 같이 놀고, 염소와 곰이 함께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리지 않는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만 부활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부활합니다. 우리 삶의 환경도 부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새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하늘도 땅도 부활한다는 겁니다. 부활한 사람이 요람처럼 안겨 최상의 삶을 살도록 모두 변합니다. 부활 때에는 이 우주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궁극 소망이요, 역사와 우주의 종말론적 비전입니다. 


오늘 새벽에 발생한 주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의 부활이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주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요 담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뜻은 이제 우리 앞에 부활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뒤따라 다음 열매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중요합니다. 과수원의 묘목이 첫 열매를 맺으면 그 다음해부터 줄줄이 과실이 열립니다. 마찬가집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영광을 돌려 마땅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의 첫 열매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삶은 그 자체로 허무하고 절망일 뿐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인생은 눈물 그 자체일 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 앞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하십니다. 부활을 고지했건만 왜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더는 무덤을 향해 절망하거나 울지 맙시다. 더는 허무를 노래하지 맙시다. 오늘 새벽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내 뒤에서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마리아야!”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디 지금 나를 부르고 계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눈에서 눈물을 닦읍시다. 슬퍼하지 맙시다.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형제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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