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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구원의 대서사시
설교본문 요 19:28-30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4-14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414m.mp3

20190414m

요 19:28-30

구원의 대서사시


(요 19:28-30, 개정)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유대인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하나님은 믿지만 주님은 믿지 않습니다. 세계 인구가 약 76억인데 신구교를 합쳐 24억 명이 기독교 인구입니다. 전체 지구촌 인구의 33% 정도입니다. 그런데 24억의 99% 이상이 다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들은 살인강도 바라바보다 주님을 더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바를 놓아주라며 악을 쓰자 빌라도는 너희가 그의 핏값을 당하라고 하며 손을 씻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주후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그들은 본토에서 쫓겨납니다. 그 땅에는 로마가 주변의 여러 식민지에서 아랍 사람들을 대거 이주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지순례도 막았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당시에 이주시켰던 사람들이 바로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아랍 사람들입니다. 약 260만 명입니다. 한편 로마에 의해 팔레스틴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2000년간 전 세계를 떠돌며 디아스포라로 살다가 1948년에 독립하고 기적처럼 나라를 재건합니다. 지금 지구촌 전체 유대인의 수는 약 1600만 명입니다. 미국에 700만, 이스라엘 본토에 500만, 나머지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삽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와 독일의 다카우는 홀로코스트의 장소입니다. 다카우에서는 10년간 무려 20만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주로 가스실에서 독살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싫어합니다. 뱀하고는 같이 자도 유대인과는 같이 못 잔다고 할 정도입니다. 히틀러는 이런 깊은 반유대 감정을 이용해 600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할까요?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틀러의 자서전을 보면 십자가를 들먹이며 유대인들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이 2000년간 지구촌의 천덕꾸러기로 지냈던 비극 이면에는 빌라도에게 핏값을 받겠다고 하고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며 악을 썼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주님을 미워하고 싫어했을까요? 근본적으로 구원관, 메시아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야말로 오랜 세월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주님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의인들을 위한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죄인은 벌하고 의인에게는 상을 줘야 합니다. 의인의 정죄와 고발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창녀와 세리, 가난한 자, 불치병자와 함께 하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은 항상 주님의 고발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에 유대인들이 모두 기절초풍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썼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주범은 누구일까요? 그토록 주님을 미워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던 유대인들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입니까? 아니면 십자가형을 선고한 본디오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실제 주님을 못 박은 형집행관들입니까? 다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주님을 십자가에 다셨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기약대로는 하나님의 예정대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죄인을 위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 계획이었는지 정말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주님이 실제로 얼마나 목이 마르셨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대본에 따라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만큼 정밀하고 정교하게 하나님의 사전 계획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24절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이 구약 시편 22편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본문 30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보통 영화를 보면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떠나는 순간 고개가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고개를 숙이고 나서 영혼이 떠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각본대로 죽어주신 겁니다. 자 준비되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숙이니 이제 제 영혼을 거둬 가십시오. 다 이루었다는 선언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이제 망했다. 실패했다 라고 해야 맞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뒤에는 이런 게 더 어울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 이루었다, 다 성취했다, 완성했다고 하셨습니다. 유사 이래 가장 비참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숨을 거두는 분이 전혀 그 험악한 죽음에 어울리지 않게 다 성취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초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의도한 하나님의 계획과 비밀, 각본을 완벽히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속 프로젝트를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장엄한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돌발변수가 아닙니다. 완벽한 인간 구원의 대서사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데 그것으로 인간 구원의 프로젝트를 이루었다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1장 12절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십자가가 신묘막측해서 하늘의 천사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십니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고유한 품성인 속성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의 절대적 성품은 공의입니다.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공의라는 속성 때문입니다. 죄에는 상당한 벌을 내리고 선을 행한 것에는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유전적으로 원죄를 쓰고 태어납니다. 인간은 운명적인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유전적으로 죄인이기에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공의 이외에도 사랑이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 또한 공의만큼이나 절대적인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공의의 거룩하신 분으로도 부르지만 사랑의 하나님으로도 부릅니다. 요한일서 1장에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끝없고 불가사의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품성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됩니까? 공의와 사랑이 충돌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속성을 충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3의 속성도 갖고 계십니다. 지혜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는 십자가가 착상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충족시킨 놀라운 지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벌하셨고 대속을 통해 사랑을 실현하십니다. 주님은 절대 의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게 아닙니다. 유사 이래 둘도 없는 죄인으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물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말씀 그대로입니다. 세례요한도 주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주님은 사랑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심판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인일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공의라는 수직 기둥과 사랑이라는 수평 기둥이 교차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가 착상하고 연출한 위대한 인간 구원의 드라마요 인간 구속의 대서사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 이루셨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사도 바울만의 고백이요 다짐이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고백, 다짐으로 진정한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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