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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가 나를 팔리라
설교본문 마 26:14-2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4-07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407m.mp3

20190407m

마 26:14-25

그가 나를 팔리라!


(마 26:14-25, 개정)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여러분은 주후 2000년 인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인 한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우리는 거의 다 가룟 유다를 꼽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오랜 기독교 문화의 영향 때문에 아기 이름을 지을 때 보통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작명합니다. 그런데 유다라는 이름은 절대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독일 같은 경우는 아예 법으로 금했습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자서전에서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하며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메시아를 살해한 패륜 집답이라고 하면서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면서 유럽인을 선동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명은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서 연유합니다. 유다 지파가 가장 영향력 있던 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될 때 북왕국은 이스라엘로, 남왕국은 유다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남왕국의 중심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예수님도 다 유다 지파 출신입니다. 유다 지파로부터 유대인이라는 민족명이 나왔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어떤 이름보다 유다를 선호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 이후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그 이름이 완전히 금기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이제 영원한 배신의 대명사요 아이콘입니다. 유다 앞에 붙은 가룟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명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의 유다입니다. 유대인은 출신지의 이름을 붙여 구분한 것입니다. 


주님은 어째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주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아셨지 않겠습니까? 실은 그래서 일찍부터 가룟 유다에 대한 해석이 많았습니다. 그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다복음입니다. 그것을 탄소 동위법으로 확인해 보니 상당히 이른 시기에 생긴 문서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위경입니다. 그 내용은 주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 덕분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랬기에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구속사적으로는 가장 결정적으로 주님의 구속사역을 도운 주님의 위대한 사도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에게 배신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의 명예 회복과 복권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 유다복음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것은 순억지입니다. 황당한 사실 왜곡입니다. 그가 주님의 구속사역에 필연적이었다면,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왜 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했다고 말씀했겠습니까? 주님은 그의 배신 없이도 얼마든지 구속사역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를 두둔하는 그 어떤 해석도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어설픈 문학적 상상력보다 주님의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확실합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 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가룟 유다에 대해 하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개인 신상뿐 아니라 어떤 경로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왜 주님을 배신했는지 베일에 가려있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12제자 가운데 최소 2사람에 포함되는 젤롯당원이었다고 봅니다. 열혈당은 극우 민족주의당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처음부터 뜻이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야심을 지니고 주님을 따른 겁니다. 실제 유대 사회에는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아관은 영광과 승리, 정치적 메시아였지 고난의 메시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이 현 정권을 몰아내고 왕이 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여 제자들이 서로 싸우고, 인사 청탁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끝까지 주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보니 주님이 거사는커녕 자꾸만 딴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여기서 심한 배신감을 느낍니다. 속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당장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주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이런 식으로 보복한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3년간이나 따라다니던 제자가 돈 몇 푼에 자기 스승을 팔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그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선 그는 양심이 불량했습니다. 주님이 최후 만찬석상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저저마다 나는 아니지요? 하는데 가룟 유다는 떡으로 입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떡 그릇에 손을 넣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떡 그릇에 손을 넣는자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잽싸게 손을 빼낸 다음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제사장에게 스승을 팔고 난 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머니에서 스승을 판 돈을 만지작거리며 스승에게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룟 유다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본문 앞에는 한 여인이 주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나무랍니다. 향유를 허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은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더 낫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이중적이었습니다. 제자 가운데는 세리 출신도 있었습니다. 마태입니다. 그런데도 회계를 가룟 유다가 봤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남의 신임을 받았다는 얘기인데 그것은 다 위선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완벽했냐면, 주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 제자 중 누구도 가룟 유다가 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3년간이나 한 솥밥을 먹은 스승을 팔 수 있습니까? 은 30 데나리온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 이하에 나오는 한 여인은 그 10배인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주님께 쏟아 붓습니다. 그랬으니 당연히 유다가 흥분할 만 합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사랑한 그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지낸 제자들마저도 죄 안 짓고는 못 삽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사죄를 빌면 누구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고, 우리에게는 그런 사죄의 복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불행입니다. 


사실 실수나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는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눈물로 회개했지만, 그는 끝내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끝까지 시침을 떼고 그럴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유다에게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판다고 한 것은 이미 주님이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아예 콕 찍어 네가 판다고 했을 때도 그는 시침을 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도 주님 말씀이 생각나 즉각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도 처절하게 회개를 했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의 몇 차례에 걸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두 사람의 영원한 갈림길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마지막에는 뉘우치긴 합니다. 은 30을 도로 제사장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목을 매단 겁니다. 그것은 삶의 저항일 뿐입니다. 회개는 유턴하는 것입니다. 심정적 후회나 반성은 아직 후회가 아닙니다. 뉘우쳤으면 즉각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지 여전히 돼지 우리에 앉아 가슴을 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지만 새로운 삶은커녕 도리어 삶을 포기합니다. 이쯤되면 주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을 사람 아닙니까? 


단테의 지옥편을 보면 지옥 맨 밑창 9지옥에 가룟 유다가 가 있습니다.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12사도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 지옥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디 가룟 유다의 비극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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