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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신앙과 성품
설교본문 행 15:36-4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3-17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317m.mp3

20190317m

행 15:36-41

신앙과 성품


(행 15:36-41, 개정)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사람의 성품이 바뀔까요? 성질이 급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느긋해지고, 성격이 뾰족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너그러워지고 부드러워집니까? 사도 요한은 버럭 화를 잘 내서 주님이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이셨는데, 후에는 가장 관대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에는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요한처럼 정서와 성품이 바뀔까요? 여러분은 예수 믿고 변하셨습니까? 내성적이던 분이 외향적으로 바뀌고, 소극적이던 분이 적극적으로, 매사에 부정적이던 분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까? 모세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합니다. 모세만한 온유한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토록 온유했던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나안 문턱인 비스가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때 모세 나이가 120세로 눈이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지만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인데도 못 들어갔을까요?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광야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폭동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난동을 부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백성들을 한자리에 모아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분부대로 백성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그야말로 불같은 화를 내며 반석을 향해 명령하지 않고 자기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 반석을 두 번이나 후려갈깁니다. 결국 샘은 터졌지만 하나님이 모세의 그 분노와 혈기를 문제 삼으십니다. 평소에 그토록 온유했던 모세가 결정적 순간에 성질을부려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함으로써 천추의 한을 남깁니다.


본문은 2000년 교회사에서 최초의 이방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대판 싸우고 두 사람이 갈라서는 대목입니다. 두 사람은 원래 성령의 계시로 한 팀이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가가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다가 힘들다며 중도 하차한 전과를 들어 반대합니다. 바나바는 원래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의 성품은 매우 온유하고 관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나바를 권위자라고 불렀습니다. 권위자는 권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권위자라는 말에서 요즘 교회의 중요한 직분인 권사가 나왔습니다. 바나바가 권사가 원조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워낙 바울이 악명 높았기에 바울이 위장 회심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바나바가 나서서 바울의 후견인을 자처했습니다. 바나바 때문에 사도들이 바울을 받아들였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이 기독교에 정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성격은 바나바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아주 강직하고 열정적이고 다혈질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9) 얼마나 과격한지 모릅니다. 자기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베드로 사도를 바울이 성도들 앞에서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바울은 회심 전에도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3절 이하입니다.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유대교 때도 그랬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바울처럼 열정적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옛날 유대교를 믿을 때도 지나칠 정도였다고 했는데 기독교를 믿을 때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기질이나 성품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성격이나 정서 때문에 고민합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왜 자기 성질이 변하지 않느냐고 좌절하거나 비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순화는 될 겁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으면 성품이 변해서 모두 천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소속과 운명이 변하고 신분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성격이나 기질이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전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내 뒤에서 마귀가 나를 조종했는데 이제는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고 강제하시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성격이나 기질이나 정서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색깔이고 개성이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품성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에는 바울의 다혈질이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쪽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제는 그의 기질이 교회를 뜨겁게 섬기고 사람을 구원하는 쪽으로 사용됨으로써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성격이나 정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다 소중합니다. 부정하거나 비관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내 성품을 발동하는 목적이 달라져야 합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날카로우면 날카로운 대로 오직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내 기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똑같은 칼인데 전에는 주로 남을 해치는 흉기였지만, 이제는 곪은 곳을 째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메스로 쓴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돈을 도박하고 마약하는 데 탕진했는데, 이제는 이웃을 위해 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데 쓰는 것입니다. 칼이나 돈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 방향이나 목적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바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질을 바꾸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므리바 사건을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성질을 부려서 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일지라도 율법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기에 그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에 모세를 못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율법이 아닌 복음으로만 천국을 간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리바 사건을 모세가 하나님께 성질부린 것으로만 생각하면 심오한 뜻을 왜곡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정서나 성품을 다 인정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각자의 개성과 성품과 기질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급하면 급한 대로, 소심하면 소심한 대로, 과격하면 과격한 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기여하라고 하십니다. 성도들 간에도 마찬가집니다. 나와 취향이 다르고 정서가 다르다고 하여 나쁘다거나 틀렸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를 때도 다 다릅니다. 어떤 분은 꼿꼿하게 부르고, 어떤 분은 박수를 치며 부릅니다. 다 취향과 정서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각자의 기질과 정서와 취향을 존중하며 함께 가야합니다. 함부로 남을 배제하고 적대시하면 그것은 절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그가 그렇게도 불같이 성질을 내며 마가를 반대하고 자기의 은인이다 시피한 바나바와 갈라서기도 했는데, 그의 말년에는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마가는 자신에게 유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성숙해진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성격이나 정서, 성품에 대해 확신을 가집시다. 주님은 우리의 성품이 바뀌길 바라시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남의 성품을 존중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유한 성품과 정서로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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