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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다시 믿음으로 도약하려면
설교본문 행 10:24-35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9-02-10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90210m.mp3

20190210m

행 10:24-35

다시 믿음으로 도약하려면


(행 10:24-35, 개정)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다시 믿음으로 도약하는 교회>입니다. 성도 개인과 교회가 다시 믿음으로 도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상고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 가운데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시대, 곧 교회 시대의 개막을 뜻하기에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또 다른 이름이 성령행전입니다. 바울의 회심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사건이기에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바울행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방인 고넬료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의 내용은 복음이 어떻게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졌는지의 전개과정을 보여줍니다. 고넬료 사건이 이방인 구원역사의 효시라는 것입니다. 최초로 이방인을 향해 복음의 문호가 개방된 공식적 사건이 고넬료 사건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여호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배타성이나 독선적 선민의식이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만의 전유물이라는 게 유대인들의 배타성이요 선민의식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여호와의 복이 오직 유대인만의 것이었습니다. 천국에는 유대인만 가고, 이방인들은 지옥 불의 땔감 취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성전 마지막 네 번째 담에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이 담을 넘으면 죽는다!> 더러운 개가 하나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면 반드시 죽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점령군들도 반드시 교육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이나 성전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방인인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날마다 이방선교의 가부를 놓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때 발생한 사건이 바로 고넬료 사건입니다. 


고넬료가 어떻게 베드로 사도를 자기 집으로 초청해 복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고넬료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계시를 본 것입니다. 어떤 처녀가 날마다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의 어느 남자와 결혼을 하라는 계시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이미 유부남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계시가 남자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그 처녀에게만 계시가 나타났습니다. 처녀는 날마다 목사님을 찾아가고, 그 남자의 집까지 찾아가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결국 교회는 그 여자를 교회에서 치리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계시라면 양쪽 다 임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수태를 고지합니다. 마리아의 임신소식을 듣고 괴로워하고 있는 요셉에게도 천사가 나타납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고, 두려워말고 아내로 맞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계시입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고넬료에게도 같은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방인을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환상을 보이십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온갖 부정한 생물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부정한 생물들을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자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이나 안식교도들은 율법이 정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지만,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부정한 음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음식보다 더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더는 이방인에게 천국, 복음 등이 금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실제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와서 맨 먼저 한 말입니다. 28절 이하입니다.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베드로가 계시를 제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이 정한 온갖 금기들에 대해 복음의 이름으로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이자 복음의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이 극적으로 성사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복음을 선포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 이하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합니다. 그 물적 증거로 방언이 터집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물세례를 베풉니다. 이방인들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다른 사도들에게 고넬료 사건을 상세히 보고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가정이 복음을 받고 회개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방인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생히 체험케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말자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회의였던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전도가 합법적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이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의 기수가 되어 로마까지 정복한 것입니다.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믿음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대목입니다. 고넬료가 거듭나기까지 취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그 가족들은 최대한 모여서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도 일단 모여야 합니다. 최대한 모이는 교회가 역동적이고 은혜가 충만하고 어떤 미션이든 잘 감당해냅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늘 허전하고 생동감이 없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모이는 만큼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응답은 기도해야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영광은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할 때 극대화 되는데,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이것들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모임과 은혜는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신자는 자주 모여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그 삶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교회가 모여 예배하는 행위가 우리 정서와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면 가족이나 이웃을 대할 때도 한결 부드럽고, 거친 정서가 순화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느끼십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 산에서 하산할 때, 그 광채가 엄청났기에 백성들을 위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나면 자신은 잘 못 느껴도 표정이 많이 달라집니다. 저는 척 보면 압니다. 은혜를 받으신 분은 예배 마치고 돌아갈 때 얼굴에 표가 납니다. 시험에 들어서 가는 분은 그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 올해 다시 한 번 믿음으로 도약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신다면 고넬료의 가족처럼 모이기에 힘씁시다. 말세가 되어갈수록 사람들이 모이기에 힘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고넬료가 엎드렸다고 합니다. 로마군대 장교는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정복자가 식민지 백성의 종교를 신봉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집에 들어서는 베드로에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26절입니다.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정비석의 <홍길동>을 보면 합조 스님에게서 길동이가 무술을 배웁니다. 스님이 길동이에게 묻습니다. 너는 폭포를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길동이는 뜻을 낮출수록 동조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느낀다고 답합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할 때 마태복음 11장 같은 데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게 성경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30세 청년의 말임을 알면 좀 다릅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것은 교만의 극치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 성경을 읽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주님이 교만의 화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자기비하의 극치요, 겸손의 화신임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주님만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고넬료처럼 자기 계급을 떼고 깊숙이 엎드리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처럼 낮은 데로 임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올해도 다시 한번 믿음으로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자기에게 보낸 자로 확신했습니다. 33절입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는 우연이 아니라 주께서 베드로를 자기에게 보내셨다고 믿었고, 베드로가 하는 말을 다 주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확신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그가 선포하는 말씀에 대한 이렇게 깊이 신뢰할 때 은혜가 됩니다. 주님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바울이 직접 복음을 선포해도, 은혜는커녕 도리어 강퍅하게 굴었던 사람들은 다 주님이나 바울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보다 바울보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요즘은 설교 못하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에 대한 신뢰는 점점 추락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없습니다. 목사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추락했기에 어떤 말씀을 선포해도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납니다. 목회자는 주님이 우리 교회에 보내셨고, 오늘 메시지는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어야 설교가 은혜가 됩니다. 적어도 고넬료 가족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은혜가 넘쳤습니다. 성령충만했습니다. 모두 그날로 세례를 받고 그들은 이방인 구원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넬료 가족과 같은 자세를 취해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도약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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