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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아기와 구유
설교본문 눅 2:8-1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12-23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1223m.mp3

20181223m

눅 2:8-14

아기와 구유


(눅 2:8-14, 개정)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본문은 2018년 전 첫 성탄 때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대목입니다. 11절 이하를 다시 보십시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표적이 바로 강보에 싸인 아기라는 것과 구유에 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메시야, 인류의 구주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인 갓난아기로, 낮고 초라한 자리인 외양간 구유로 오셨을까요? 어째서 그것들이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라는 표적이 됩니까?


첫 번째 표적은 갓난아기입니다. 주님이 왜 아기로 오셨을까요?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기에 어린아이나 여성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최소한 12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러야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메시야라고 해도 어린아이로 나타나서는 절대 대접 받기가 어렵고, 그 신분이나 정체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게 당시의 사회였습니다. 주님은 어차피 마리아와 요셉의 정상적 부부관계에 의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셨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은 몇 살부터 시작했습니까? 그는 처음부터 청년으로 시작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고 나서 아담과 손가락을 맞대며 교감하는 장면인데, 아담은 근육질의 청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관리를 맡기시고, 아내 하와도 맞게 하십니다. 아담은 아마 20대였을 겁니다. 하와도 마찬가집니다. 나자마자 아담과 결혼했으니 20대였을 것입니다. 물론 과학자들은 아담은 25년 전에 태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은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에 하나님이 25살짜리 아담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적 진실을 존중하지만 이 성서적 진술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갓난아기가 아니라 아담이나 하와처럼 갓난아기가 아니라 청년으로 세상에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굳이 나약한 존재인 갓난아기로 메시야를 보내셨을까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어린 아기로 태어났다 해도 비공개적으로 있다가 나이가 들어 세상에 나타낼 수도 있었을텐데,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만천하에 공개됐습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고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먼저는 겸손한 자가 주님을 뵐 수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화신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누구도 성탄하신 주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로 오신 주님을 무시하고 적대했던 세력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에 나약한 아기로 오신 메시야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했던 목자들, 동방박사들,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지만 그가 곧 구주요 메시야라고 확신하며 그 앞에 엎드리며 경배했습니다. 사실 아기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당시 사회통념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않으면 아기 앞에 경배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주님을 외면합니다. 올해도 예외없이 겸손한 자만이 갓난아기로 오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기로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선구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처음부터 아담처럼 세상에 출현하셨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겪고 당하는 모든 삶의 애환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억울함이 무엇인지, 눈물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겪는 고뇌를 다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가장 깊이 헤아리시고, 우리가 바라고 원하며 기도하는 것을 진심으로 공감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든 우리를 돕고 지지해 줄 태세를 갖추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공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표적은 구유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인 외양간의 구유에 오시지 않았던들 절대 다수인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나올 수 있었을까요? 마구간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누구든 통제 없이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만일 궁권이나 대저택에 태어났다면 목자 같은 사람은 절대 주님을 경배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너무 잘 나고 교만해서 주님을 뵐 수 없는 사람은 있어도 너무 가난해서 못 뵐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구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 돈이 없어 교회 못 다닌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 교회는 그런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원래는 돈 없는 사람도 아무 문턱 없이 경배할 수 있는 분이 주님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도 나아오라고 가장 낮은 자리에 고의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너무 크고 화려하고 고급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위화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외양간에 계십니다. 주님은 아름답고 따뜻한 요람이 아니라 춥고 초라한 구유에 성탄하셨습니다. 교회는 항상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구유로 오신 사건에는 그보다 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주님을 뵙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희생되실 어린 양으로 성탄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 희생제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존재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 태어날 장소가 어디입니까? 양이 궁궐이나 대저택에서 태어날 일 있습니까? 당연히 외양간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외양간 탄생과 구유에 뉘이심은 결코 감상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행한 사건도 아닙니다. 보다 깊은 구속사적 의미의 사건입니다. 구속사적 계시가 함축된 사건입니다. 주님의 외양간 성탄은 이미 주님의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을 암시하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구유에 뉘신 주님의 성탄은 어린 양으로서의 대속의 죽음을 계시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 주님의 죽음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습니다. 외양간에서 주님의 최후를 보아야 합니다. 


부디 성탄의 따스한 은혜와 어린 양의 은혜가 여러분께 가득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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