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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꽃보다 말씀
설교본문 호 6:1-6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12-09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1209m.mp3

20181209m

호 6:1-6

꽃보다 말씀


(호 6:1-6, 개정)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나라 수출 상품 가운데 단일 품목으로 글로벌 시장을 25% 점하는 효자 상품이 3가지입니다. 첫째는 휴대폰입니다. 중국의 추격이 무섭지만 아무튼 세계 시장의 26.5%를 차지하며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둘째는 반도체입니다. 2년 연속 미국의 인텔을 제치고 점유율 27.9%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놀랍게도 성경입니다. 2018년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최대 성경 제작국이자 수출국입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 성경 시장의 35-38%를 점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유럽의 국가들이 성경을 제작하고 수출했습니다. 지금은 뜻밖에도 우리나라가 제1위의 성경 수출국입니다. 한국 개신교 역사가 120년인데 이런 일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올해도 성서공회는 45개의 언어로 600여 종의 성경을 제작해 124개국에 수출하고, 많은 양을 무상으로 보급합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쪽에서 유통되는 성경 절반이 우리나라가 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연간 6억 부 제작되어 보급되는 영원한 밀리언셀러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그 시기의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학자인데, 그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날카로웠습니다. 그는 성경을 공공연히 죽은 책, 화석화된 고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100년만 지나면 박물관에 가서야 성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0년 만에 그의 책을 주로 출판한 볼테르 출판사에서는 그의 책이 아니라 성경을 인쇄하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1880년부터는 파리 샹제리제의 그의 생가가 프랑스 성서공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서재는 지금도 성경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볼테르는 1778년에 죽었지만, 그가 죽은 책이라 단언한 성경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유사 이래 성경만큼 많이 제작 보급된 책이 없지만, 사람들이 성경만큼 안 보는 책도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고 모순입니다. 신자들은 성경을 기독교인의 액세서리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할 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 드나들 때 들고 있어야 하는 구색 정도로 성경을 취급합니다. 오죽하면 수십 년, 아니 평생을 신앙생활하면서도 성경 한 번 읽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신자가 90%가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도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정말 볼테르의 말처럼 죽은 책, 화석화된 고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볼 때만 내 심령을 쪼개는 운동력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지, 그저 덮어두거나 들고만 다니면 2-3000년 전의 고전일 뿐이고 유대인들의 옛 역사일 뿐입니다. 우리교회가 야탑동에 있을 때 한 번은 차병원에 입원한 신자를 심방하며 이사야 44장을 읽었습니다. 그분이 제가 읽은 말씀을 듣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이 이미 50이 넘었고 그 나이만큼 신앙생활을 했던 분입니다. 그분 말을 듣고 제가 더 놀랐습니다. 사실 그분이 여러 번 그 말씀을 들었겠지만, 병상에서 들으니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은 겁니다. 


어떤 분은 친구의 강청에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했는데, 예배 묵도 때 시편 102편 낭독에 필이 꽂혔습니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6절) 그 말씀이 그렇게도 자신의 처지와 맞아 떨어졌는지 자기도 모르게 펑펑 울고서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이미 안양의 큰 교회의 은퇴 장로가 되었습니다. 요즘도 저와 만나면 그 간증을 합니다. 


흔히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면 믿습니다를 반복하게 합니다. 방언 못하는 사람도 모아서 할렐루야를 반복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방언 못하는 사람도 저절로 혀가 꼬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사기, 자기 최면, 자기 암시라고 합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해야 하고, 그 지식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은 먼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나서 예배하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바른 순종이고 응답이지 맹목적이고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꽃인데 예배보다 말씀이 먼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바르게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제사도 번제도 알고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되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의식이나 제사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주일날 예배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한 주간의 신앙생활을 다 때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미신입니다. 무속이나 미신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거기엔 경전이 없고 치성만 있습니다. 천지신명은 특정 신이 아니라 천지간에 있는 모든 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이든 상관없이 내 소원만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올해도 이달 31일 밤 송구영신예배 끝나면 저 강원도 정동진으로 가서 일출 보고 빌 것입니다. 이렇듯 무속이나 미신은 내 소원이 전부지 그 대상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그분의 뜻, 요구, 주문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거기에 바르게 응답하고 결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옛날 미신 섬기던 버릇대로 하나님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도 그저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쯤으로 생각합니다. 영원, 거룩, 하나님의 뜻, 어떻게 믿는 게 바른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흔들리고 회의에 빠집니다. 일이 조금만 잘 안 풀려도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의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소치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너무 모릅니다. 사울 왕이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되 짐승까지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잡아 오고 소떼와 양떼도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그는 핑계를 대기를 여호와께 제사하기 위해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 말씀 듣는 게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절대 자기 뜻과 소원을 관철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그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것이어도 그렇습니다. 열심도 헌신도 하나님 뜻에 바른 응답일 때만 믿음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다 거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지성적인 분입니다. 하나님은 지성, 지혜, 지식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성을 닮아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적인 존재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믿음도 당연히 지성적이어야 합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모르면 믿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아무리 입으로 믿습니다를 반복한다고 해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신뢰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뢰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는 만큼 상대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부디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갑시다. 주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더 많이 쌓아갑시다. 기독교 신앙은 지혜와 지식의 원천인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삼기에 반드시 지성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지식이 풍성해서 크게 흥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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