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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루터와 칼빈
설교본문 시 115:1, 롬 1:17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10-28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1028m.mp3

20181028m

시 115:1, 롬 1:17

루터와 칼빈


(시 115:1, 개정)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시편 본문은 칼빈의 중심 구절이고, 로마서는 루터의 중심 본문입니다. 우리는 개신교입니다. 구교인 로마 가톨릭과 결별을 선언하고 개혁을 통해 좀 더 성경적인 교회,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자고 출범한 신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작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봅니다. 그래서 올해가 종교개혁 501주년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만이 아니라 스위스의 츠빙글리, 프랑스의 칼빈도 있고, 영국의 존 녹스도 있습니다. 장로교의 종교개혁 원조는 칼빈입니다. 유럽에서는 칼빈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릅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의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세운 교회들을 개혁교회라 부르지 않고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h)라고 부릅니다. 개혁교회든 장로교회든 그 원조는 칼빈입니다. 


칼빈은 유럽 전체가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1509년 7월 10일 파리 북동쪽의 로용이라는 소도시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자수성가한 지방 유지였습니다. 칼빈은 14세 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제가 되려고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합니다. 거기서 그는 라틴어, 헬라어, 성경, 고대 철학 등을 배웠습니다. 칼빈은 신학이 적성에 맞았습니다. 그는 고전어에 능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한 지 5년 만에 아버지 마음이 변합니다. 아버지는 칼빈에게 신학을 그만 두고 법학을 공부하라고 합니다. 칼빈은 신학을 그만 두고 법학 공부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신학 공부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독일의 루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루터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의 광부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어느 주말에 루터는 동료와 귀가하다가 들판에서 폭우를 만납니다. 그 들판에서 친구가 벼락을 맞아 타죽었습니다. 루터는 이후 수도사의 길을 결심하고 전격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유럽 대학에서는 신학이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꼽힙니다. 고전어 때문입니다. 옛 교부 문서들은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를 모르면 교부 문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은 원서가 히브리어이고, 신약은 헬라어입니다. 그러니까 고전어가 필수입니다. 그래서 다른 전공은 다 부전공이 있는데, 신학만큼은 부전공이 없습니다. 고전어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때가 1530년대 초반으로 칼빈은 20대에 들어섭니다. 독일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미 10년을 넘기며 상당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벌이다가 순교합니다. 츠빙글리는 자신을 죽이는 로마 군인을 향해 당신은 내 몸만 죽이지 내 영혼을 못 죽인다고 하며 숨을 거둡니다. 당시 나이가 48세입니다. 루터가 아끼던 개혁의 동지요, 스위스 종교개혁의 투사였던 츠빙글리는 비명에 갑니다. 


1534년 10월 칼빈의 절친이던 니클라스 캅이라는 파리대학 철학부 교수가 파리 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어 취임하는데 그 연설문을 칼빈이 작성합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5장 3절을 중심으로 취임사를 썼습니다. 그 내용이 가톨릭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며 당국이 그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때부터 칼빈은 파리를 떠나 유랑생활을 하며 개혁을 시도합니다. 처음에는 스트라스부르에 갔다가, 거기서 스위스 바젤로, 이태리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로용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위스 제네바를 경유하는데, 그곳의 파렐이라는 사람에게 붙잡혀 거기에 머뭅니다. 한 때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 거기서 필생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를 씁니다. 제네바 대학을 설립합니다. 처음에는 제네바 아카데미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유럽의 많은 학생들에게 개혁사상을 가르쳤고, 거기서 학생들이 귀향하여 개혁을 주도합니다. 그래서 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 되었습니다. 


마침 제네바 시의회가 교회법으로 시정을 관할하고, 시민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고 치리해 달라며 전권을 칼빈에게 위임합니다. 이때부터 소위 신정이 시작됩니다. 교회법이 곧 헌법이 된 겁니다. 이때 칼빈은 은행을 설립하고, 수공업을 정착시켜 시계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의 뿌리를 칼빈주의라고 한 게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칼빈은 32세 때 결혼하지만 10년도 못 되어 부인을 잃습니다. 아들을 하나 얻었지만 2주 만에 그 아들이 죽습니다. 칼빈은 상황 자체가 우울했습니다. 또한 그의 건강은 좋지 못했습니다. 칼빈은 55세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제네바 시 전체가 울음바다가 됩니다. 장례식은 전체 제네바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는데 묘지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비석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지 사람이 그 영광을 누리면 안 된다는 것이 칼빈의 신념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어거스틴 이후 가장 위대한 저술가, 설교가, 신학자로 평가합니다. 루터가 역동적이고 치열한 운동권이었다면, 칼빈은 이성적이고 냉철한 행정가, 기독교 변증가였습니다. 루터가 온몸을 던져 시작한 종교개혁을 칼빈은 신학적이고 교리적이며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입니다.


그럼에도 칼빈과 루터의 입장이 같지 만은 않았습니다. 그 차이점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구원론입니다. 가톨릭은 행위(수행, 공덕)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공덕이 모자란 연옥에 거하는 영혼이 즉각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를 사서 돈을 통에 떨어뜨리는 순간 연옥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렇게 유럽 전역에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루터는 이 사건으로 결정적으로 돌아섭니다. 1517년 10월 31일 자신이 사제요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써 붙인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보면, 대부분 면죄부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덕이나 행위가 아니라, 면죄부가 아니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가톨릭에서 강조한 행위에 반해 루터는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칼빈의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가톨릭의 행위를 부정하고 루터의 믿음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칼빈은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믿음 이전에 예정과 선택으로까지 소급합니다. 칼빈은 루터가 말하는 믿음조차도 내 노력이나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이뤄진 예정과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 반면에 칼빈은 믿음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단지 그 예정과 선택으로 인한 구원의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고, 칼빈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되고 선택되었기에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루터는 믿음의 열매가 구원이라고 하고, 칼빈은 구원의 열매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오직 선택 받은 사람, 예정된 사람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서관입니다. 가톨릭이 범한 치명적인 과오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사제들이 독점했다는 데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사제를 통해서만 성경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제들의 권위와 교권을 유지하는 방편이었습니다. 중세 때는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만 있었고, 제작도 제한했기에 일반인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일반인은 라틴어를 모르기에 성경이 있다 해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에 착수하고 가장 먼저 손 댄 것이 성경번역이었습니다.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1000년 동안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을 일반 신자들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를 이용해 처음에 3000권을 찍어냈는데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지금도 독일 사람들은 루터 번역을 가장 사랑하고 지금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정경 66권 외에도 여러 외경과 교황의 교서까지 성경과 대등한 권위로 취급합니다만, 루터는 오직 성경만을 주장합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절대적인 규범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아예 외경이나 교황의 교서는 거짓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루터의 성경관은 상당히 진보적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열왕기서의 신빙성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는 에스더서는 성경에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 또 요한계시록 같은 것도 성경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는 성령이라고 보았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쓴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첫 로마서 주석을 낸 후 죽기 1년 전인 1563년까지 요한 2, 3서와 계시록만 빼고 전체를 주석했습니다. 칼빈이 워낙 고전에 뛰어나고 교부문서에 해박했기에 칼빈의 주석들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함께 2000년 교회사에서 불후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다음은 성찬식에 관한 견해입니다. 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사제가 기도하는 순간 정말 피와 살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그것이 과장이라고 보고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사실 이상으로 미신화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루터는 떡과 포도주를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다고 보았습니다. 상징이나 기념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칼빈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무엇으로도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위 물로도 주님의 피를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념은 다릅니다. 칼빈은 반드시 떡과 포도주로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초 주님이 제정한 성만찬의 원초적 취지는 기념이라고 칼빈은 본 것입니다. 장로교는 기념설을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의 원칙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주도하며 끝까지 두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속 왕국을 구분하고, 교회는 오직 하나님 왕국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루터의 원칙은 이원론적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왕국을 엄격히 구분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정교 분리 원칙입니다. 정치와 종교를 구분해서 오직 종교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루터는 1000년의 중세 암흑기가 정교를 분리하지 않아서 비극이 왔다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두 왕국설이 아니라, 그리스도 통치설이라는 일원론을 종교개혁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 통치설은 모든 세계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든 정치든 사회든 문화든 물질이든 권력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정을 교회법으로 관할했던 것도 바로 그런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어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범우주적이기에 그의 통치를 받을 때만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루터와 칼빈은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이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칼빈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칼빈을 따르는 틀을 유지하며 설교도 그 틀 안에서 해왔습니다. 칼빈의 이념이 우리의 개혁과 사회의 개혁에 이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