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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아버지의 마음
설교본문 눅 15:11-2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923m.mp3

20180923m

눅 15:11-24

아버지의 마음


(눅 15:11-24, 개정)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본문은 주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깁니다. 사실 본문은 누가복음 15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집니다. 또한 본문은 가장 아름답고 극적이며 감동적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흔히 우리는 탕자를 주인공으로 봅니다만, 실은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비유의 초점은 집 나간 둘째 아들보다는 오히려 그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에 맞춰져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자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돌아온 탕자>도 제목은 그렇지만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탕자는 거지 행색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 있고, 아버지는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얼굴로 아들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신비한 감동에 젖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두고 <렘브란트 자신의 영혼의 초상>이라 부릅니다. 남루한 자신의 영혼을 당신 품에 안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는 우리 사회와 비슷합니다. 모든 게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는데 재산 분배만큼은 그 사회의 엄격한 규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아들이 둘인 경우엔 맏아들에게는 2/3, 차남에게는 1/3을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도 그 규례에 근거해 자기 몫을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상속 시점은 통상 아들이 결혼해 분가할 때부터 이뤄졌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 적령기는 18-28세였으니 본문의 둘째 아들은 많아도 20세 미만입니다. 아들의 요구를 아버지는 받아들입니다. 아들은 신속히 재산을 정리해 집을 떠납니다. 


본문에는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도 있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해 멀리 달아나고 싶은 도피본능도 있습니다. 추석 명절에 우리가 귀향하는 것은 귀소본능의 발동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의 종교성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있지만, 본능적으로 아버지 집을 향한 향수에 시달리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처럼 성경이라는 가이드북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우상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 아버지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인생을 즐기고 싶은 본능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담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언가 가졌다고 생각하면 아버지로부터 달아나려고 합니다. 돈, 지식, 건강, 권력 등을 가졌다는 사람일수록 자꾸만 아버지의 권위, 말씀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합니다. 그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 없는 행복, 먼 나라에서의 행복을 약속하는 마귀의 미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 품을 떠나면 성경이 말씀하는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본문도 집 떠난 둘째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다고 합니다. 자기 멋대로 신나게 살았습니다. 더는 삶의 규범이나 통제가 없는데 못할 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탕한 삶의 극치를 달린 겁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적나라한 현주소를 보여준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그 영혼과 인생은 마귀가 접수합니다. 갖은 올가미를 씌워 그의 모든 것을 강도질합니다. 악한 곳은 어디든 끌고 다니며 그의 인생을 유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둘째 아들도 순식간에 돈을 탕진한 그는 먼 나라에서의 향락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에는 끔찍한 흉년도 들었습니다. 농경사회의 흉년에는 민심이 고약하기 그지없습니다. 문전걸식하던 그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쳐야하는 알바로 전락합니다. 그는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끼니를 제대로 때울 수 없어 돼지들이 먹는 쥐염 열매를 먹으려 해도 그것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의 종국입니다. 


거기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을 생각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탈무드에 쥐염 열매를 먹어야 회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회개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을 품군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간청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아버지 집을 등지고 아버지를 떠나지만, 아버지는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나를 끌고 다니며 유린한 후 돼지우리에 던지지만, 주님은 여전히 나를 좇고 계시고 어둡고 냄새나는 음습한 돼지우리까지 찾아오셔서 성령으로써 회개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게 하시고, 귀향을 결단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것은 성령께서 주신 회개의 결단입니다.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 회한이 아닙니다. 회개는 귀환, 귀향입니다. 만일 본문의 탕자가 먼 나라 돼지우리에 앉아서 후회만 하며 돌아갈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귀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가룟유다도 후회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대신 거기서 목을 매고 맙니다. 그는 반성은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다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회개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같은 잘못을 반복합니다. 


본문의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귀향길에 나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전에 아버지 집에 전보를 친 것도 아닌데, 집 앞에서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문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아들의 방탕한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아들에게 입을 맞춥니다. 원어에 보면 아버지가 쉴새 없이 아들에게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라고 합니다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그저 즐겁고 기쁠 뿐입니다. 


아버지의 환대는 놀랍습니다. 목욕은 물론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깁니다. 아들의 지위를 복권시킨 겁니다. 이것은 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종이 되겠다고 귀향했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소중한 당신의 아들로 받아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여 우리가 잔치하자고 합니다. 그동안 객지에서 돼지 사료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버지 집에서 넉넉하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삶을 보장 받게 된 것입니다. 24절은 아버지의 심경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입니다. 이것이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개하여 아버지 품에 안길 때 아버지가 느끼는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명절 때 고향에 가면 부모님은 그렇게 좋아하십니다. 평소에는 늘 걱정과 근심만 끼치는 자식이라도 부모는 그저 자식이 찾아온 것으로 기쁩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깨달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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