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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설교본문 마 5:17-20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9-16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916m.mp3

20180916m

마 5:17-20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마 5:17-20, 개정)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유명한 주님의 산상수훈의 초반부입니다. 8복에 이어서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이 왜 어렵고 심각할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최상위층 의인이요, 의인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너희 의가 그들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 못 간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현실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의인의 교과서 같은 존재들보다 더 나은 의라야 천국 갈 수 있다면 도대체 몇 사람이나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천국을 포기해야 합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누구입니까? 바리새파는 유대교의 한 분파였고, 서기관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해석도 하고,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여러 파가 있습니다. 크게는 가톨릭, 희랍정교회, 개신교가 있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파가 많습니다.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구세군 등이 있습니다. 주님 시대 유대교 안에도 이런 분파가 있었습니다. 우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엣세네파가 있었습니다. 무력으로 봉기해 나라를 지키자는 열혈당(젤롯당)도 있었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있던 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 귀족입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장악한 기득권자들입니다. 종교 사회에서 종교 최상위층이 바리새파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즉 세속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유대 사회는 사실상 이 양대 분파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는 구별하다는 뜻인데, 실제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서민들을 구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죄인이라는 말은 사회계급적인 말입니다. 요즘 시대에 죄인은 신앙고백적 용어이지만, 주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죄인이라는 것은 신분이었습니다. 이것을 바리새파가 결정했습니다. 바울도 원래 바리새파였습니다. 그들은 지독하고 철저했습니다. 누가복음에 18장 9절 이하입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고, 안식일과 절기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모든 상권 등을 쥐고 있었기에 고소득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지켰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한번은 유대인 친구와 택시를 타고 갔는데, 그때가 마침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그가 갑자기 택시에서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하는 수없이 따라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지갑을 열더니 몇 십 마르크를 다 주고, 5마르크짜리 동전 하나만 남기는 겁니다. 조금 있으면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택시를 타서도 안 되고, 몸에 돈을 많이 지녀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동전 하나 남기고 제게 돈을 다 줬습니다. 저는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파 인원이 가장 많을 때가 400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바리새파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파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의는 어떤 것입니까? 그야말로 율법적인 의입니다. 문자적이고 형식적이며 기계적인 의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외형 문자보다 그 근본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은 팽개치고 문자와 형식만 고집했습니다. 21절 이하를 보면 살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실제 사람을 죽였을 때만 살인이었습니다. 세상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 남을 미워한 것은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세속법의 한계입니다. 27절 이하를 보십시오. 간음이 나옵니다. 아무리 마음에 음욕을 품고 있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간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법조항보다 그 정신과 본질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는 진정한 의입니다. 실제 사람을 죽여야 살인이 되는 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조건이나 환경이 여의치 않아서 본의 아니게 죽이지 못할 뿐 상황만 맞으면 그 미움이 살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간음도 마찬가집니다. 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든 실제 행위로 옮기지 않으면 율법에서는 간음이 아닙니다. 세상법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의는 마음에 음욕을 품었다는 것이 간음죄입니다. 행위란 결국 마음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집니다. 실제 절도는 나중 문제고 그 마음에 탐심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십니다. 탐심을 품고 있으면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결국 도적질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이하입니다.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이 실제로 손 자르고 눈 뽑으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루도 못가서 다 죽을 겁니다. 내 눈, 손, 발을 범죄하게 하는 근본 요인을 찾아서 마치 손발을 찍듯이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만 연연할 게 아니라 그 동인을 찾아 보다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의 고발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근본정신을 버렸다는 고발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면서 정작 그 근본정신인 정의, 긍휼, 믿음은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더욱 신랄한 평가입니다. 25절 이하입니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33절도 보십시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것이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적 의에 대한 주님의 고발이자 분노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형식적 의는 지킬 수 없어도 주님이 말씀한 율법의 진정한 정신만큼은 추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더 어렵습니까? 오히려 문자주의가 더 쉽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비판하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 의가 외식이어서 그 길로 가면 안 된다면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정신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추구해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천국갈 수 있는데,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형식도 안 되고 그렇다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충족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의도 이루지 못함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한 복음적 의를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얻지 못함을 깨닫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의 대속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한 모든 죗값을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복음적 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인으로 간주해 주십니다. 절대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적 의의 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길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무조건 하나님이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로운 자로 간주해 주십니다. 왜냐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죗값을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통해 율법적 의를 넘어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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