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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주여, 보시옵소서!
설교본문 요 11:1-11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9-02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902m.mp3

20180902m

요 11:1-11

주여, 보시옵소서!


(요 11:1-11, 개정)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3절 하반절도 보십시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실은 이게 우리의 처지요 현실 아닙니까? 내 자녀, 남편, 아내가 병들었나이다. 우리 사회가 교회가, 나라가 병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 고백입니다. 우리가 병 들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 현실 고백입니다.


본문에는 우리가 빠진 중요한 모순이 있습니다. 그 모순이 또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3절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면 병들었다가도 신속히 나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 답지 않습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연애에 실패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그게 앞뒤가 맞습니까? 본문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하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의 친구 나사로입니다. 성경이 주님의 친구라고 소개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사로입니다. 5절은 주님이 그들을 사랑했다고 하고, 11장 36절을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라고 하면서 그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병 때문에 마침내 죽습니다. 연배가 주님과 비슷한데 30대 초반에 요절한 겁니다. 주님은 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모진 아픔, 질병, 실패, 시련, 좌절을 겪게 하십니까?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답은 4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이나 성공, 건강, 승리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패, 아픔, 고통, 질병, 죽음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불치병을 통해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길 가에서 구걸하던 어느 소경을 보며,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뜻을 위해서라고 답하셨습니다. 여러분, 아프고 병들고 실패한 현실을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시며 그 사건을 통해 기대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시다. 그 아픔, 불행을 통해 주님이 누리고자 하는 영광을 바칩시다. 형통하고 행복하고 성공한 현실뿐 아니라 병들고 고통스럽고 아픈 현실을 통해서도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 말씀도 모순입니다. 5절과 6절이 서로 모순됩니다. 앞뒤가 맞으려면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베다니로 달려오셨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틀을 미적댄 것입니다. 결국 나사로가 죽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 베다니로 가자고 하십니다. 주님은 고의로 죽기까지 기다렸다가 죽으니까 이제 깨우러간다고 하십니다. 이런 부분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변을 당하면서 소리를 지르지만 주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과 우리의 시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좌절하고 신앙생활에 실패합니다. 아무리 주님께 기대를 건다 해도 아직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살아있을 때 주님이 와서 손을 쓰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표입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래서 이제 끝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이제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 이제 내가 일을 시작한다.’ 죽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닙니다. 주님과 우리의 시간 개념, 죽음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는 죽었다고 하지만 주님은 잠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깨우시겠다며 뒤늦게 베다니에 나타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동생은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21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시험에 들어 꼼짝하지 않고 방안에 있던 마리아도 나타나 똑같이 원망합니다. 32절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것이 우리의 원망이요 주님께 대한 아쉬움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손금 보듯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에 계시고,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밖 동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시간으로 나사로의 사정을 꿰고 계십니다. 주님이 몰라서 혹은 실수로 뒤늦게 나타나신 게 아닙니다. 당시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이 늦게 나타났다고 원망합니다만, 주님은 언제나 오셔야 할 때 정확히 오십니다. 하나님이 예정한 시간표대로 주님은 출몰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시간에 출현하십니다. 늦었다는 생각은 우리의 시간, 생각일 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우리의 시간표를 들이대지 맙시다. 우리의 조급한 시간을 주님께 강요하지 맙시다. 우리 판단, 생각대로 짠 시간표를 하나님께 관철하려고 협박하지 맙시다. 우리가 세우고 만든 시간표대로 우리 병이나 아픔을 치유해주시지 않는다고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주님을 원망하거나 지레 좌절하지 맙시다. 유치한 신앙에 빠지지 맙시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너무 늦었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과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이 나타난 시간이 최적의 시간임을 믿으며 끝까지 인내합시다.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주님이 왜 죽은 나사로에 대해 죽은 게 아니라 잠잔다고 하셨을까요? 14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면서 말입니다. 죽음과 잠은 다릅니다. 나사로는 실제 죽음이었음에도, 무덤에 장사하여 이미 썩는 냄새가 남에도 주님이 왜 잠잔다고 하셨을까요? 궁극적으로는 부활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진실을 말하면,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잠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재림하는 순간, 천사들의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죽음을 털고 일어나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궁극적으로는 성공이요, 불행은 궁극적으로는 행복입니다. 불행처럼 느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요 복이 됩니다. 믿는 자의 아픔은 더는 아픔이 아닙니다. 고뇌가 더는 고통이 아닙니다. 평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도 안 되는 역설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모든 역설이 가능합니다. 25절 이하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이 부활이시고 생명이시기에 우리는 죽어도 그것이 죽음이 아닙니다.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불행이 불행이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맙시다. 사랑하시는 자가 죽고 장사되었다고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죽음조차도 잠일 뿐입니다. 실패도 좌절도 마침내는 성공일 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모순과 역설이 실제로 우리의 생명이요 부활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직접 하든 중보자를 통하든 주님께 우리의 사정을 고해야 합니다. 자신도 기도하지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것도 시너지 효과가 대단합니다. 탄력이 붙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 자신들의 형편을 호소했습니다. 주님이 사실상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지만,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 우리 사정을 호소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에는 우리의 신앙고백, 사랑, 간절함, 절실함이 다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다음에 응답하십니다. 바야흐로 기도의 계절이 왔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우리의 절절한 호소가 주님의 심금을 울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믿음입니다. 25절뿐 아니라 40절도 보십시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주님이 부활과 생명이심을 믿고 극복하지 못할 어둠의 세력은 없습니다. 마침내 나사로의 동생들이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전부라 생각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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