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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처럼
설교본문 마 6:25-34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7-29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729m.mp3

20180729m 

마 6:25-34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처럼


(마 6:25-34, 개정)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 세상에서 이보다 더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이 또 있을까요? 그래도 염려가 되면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굶지도 않고 언제나 아름답고 건강하고 신선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는 아무 염려도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불안에 떠는 아이에게 불러주는 엄마의 따뜻한 자장가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구절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과연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지 않고 어떻게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살 수 있을까?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내일을 위한 준비나 설계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려면 세상을 살면서 염려할 수밖에 없는 온갖 삶의 모순이나 부조리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들지 않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염려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강변한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염려는 무익한 것이고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염려는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염려의 비생산성을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염려한다고 키가 크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신장의 열세에서 오는 신체적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한들 키가 크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한다고 키가 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므로 염려는 백해무익입니다. 


주님은 염려를 비신앙적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치명적으로 해롭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아이들은 왜 염려하지 않을까요? 엄마 아빠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하늘처럼 믿습니다.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강진이 발생해도 엄마 아빠만 곁에 있으면 아이들은 오히려 그 상황을 즐깁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듯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천국 간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를 곁에 두고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는 아이가 정상입니까? 그것은 아이의 몫이 아닌 엄마 아빠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전적으로 믿음의 문제요, 불신앙의 소치라는 게 주님의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염려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비신앙적인 염려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처방은 이것입니다. 


우선 우리 삶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왜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셨을까요? 왜 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을까요?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 존재의 근거, 그들 생존의 원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가 거저 살아가지 않습니다. 들의 풀 한 포기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새와 백합화가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김쌈하거나 곳간에 저장하지 않지만, 밤낮 염려하며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미물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돌보시는데,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신 우리를 하나님이 더욱 잘 입히고 먹이지 않겠습니까?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는 독수리가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번역이 그런 것이고, 가장 작은 새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새나 백합화는 창조물이고 자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만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왜 염려와 걱정을 하십니까? 우리는 고아나 사생자가 아닙니다. 엄연히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가 우리 머리터럭 하나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새의 깃털은 몰라도 우리 머리터럭은 다 세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녀여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보다 백합화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새보다 백합보다 우리를 얼마나 더 잘 지키고 보호하시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아직도 우리 인생을 우리 재주와 능력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염려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버지가 우리 삶과 운명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인정합시다. 그게 무엇이든 절대 우리가 애쓰고 고민하고 염려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깨달읍시다. 그래서 하루라도 속히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십자가 아래 내려놓읍시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고뇌로부터 우리 영혼이 벗어나고 해갈합니다. 


다음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의식주가 먼저가 아닙니다.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의가 먼저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당장 먹고 사는 게 더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밤낮 염려에 붙잡혀 삽니다. 그러나 주님은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의식주를 자기 삶의 최우선 목표로 삼거나 생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지상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주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의식주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삶의 후순위로 내밀고 있습니다. 의식주가 우리 인생의 최고 가치인 한, 누구도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합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합시다. 우리는 절대 평생 먹고 마시며 입는 문제로 염려하며 살다가 죽을 인생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해도 실은 다 잘 먹고 잘 살자로 귀결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가 우리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 필요를 다 채우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설적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새나 들꽃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그들은 곳간이나 창고가 없습니다. 그날 주시는 양식으로 살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날 주시는 하루분의 만나로 살았습니다. 더 거두면 거기서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요즘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는 못 삽니다. 창고에 쌓아놓지 않으면 못 삽니다. 우리는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갑니다. 누구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죽는 소리하지 않고 탐욕과 욕심이 성에 차지 않아 불평합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청빈, 무소유를 미덕으로 여겨왔습니다. 이제는 어림없습니다. 주님도 바울도 어거스틴도 프랜시스도 다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난이 가장 큰 불행이고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가난하게 살자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자제합시다. 염려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하고 탐심을 발동한 데서 옵니다. 마음을 비웁시다. 욕심에 찌든 마음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심령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얼마나 거칠고 황폐합니까? 얼마나 강퍅하고 척박합니까? 그게 다 탐욕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삽시다. 주님이 어느 부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텐데, 네가 잔뜩 쌓아 놓은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것은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후반기는 우리 모두가 염려가 아닌 믿음으로 승릿합시다. 탐욕이 아닌 자족과 감사로 삽시다.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복 있는 영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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