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16
Extra Form
설교제목 또 다른 보혜사
설교본문 요 14:16-18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5-20

20180520m

요 14:16-18

또 다른 보혜사


(요 14:16-18, 개정)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주가 소중합니다. 매 주일이 복 됩니다. 오늘은 더욱 그렇습니다. 내일이 성년의 날이라 오늘이 청년주일이고, 2000년 교회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뜻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는 성령강림절이 그 원년입니다. 성령강림 현장에서 성령을 체험한 120명의 성도들이 교회의 모체입니다. 120명의 성도가 원시 기독교 공동체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시대의 개막과 함께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구약 때부터 지켜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수한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오순절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이라 부릅니다. 왜 성령강림이 오순절에 발생했을까요?


우연은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오순절은 맥추절입니다. 오순절을 다른 말로는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한 해 밭농사의 첫 열매가 보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도 맥추감사절을 7월 첫 주에 지킵니다. 우리는 6월 하순에 보리를 수확하지만, 이스라엘은 5월 초순에 수확합니다. 그래서 이 때 맥추절을 지키는 겁니다. 왜 오순절이냐면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을 칠칠절이라고도 하는데 일곱 안식일 다음날이라고 해서 그렇습니다. 맥추절, 오순절이 초실절이기에 성령강림이 일어났습니다. 보리가 한 해 농사의 첫 열매이듯 성령강림이야말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약 때도 성령은 역사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도 성령이 역사했습니다. 구약 때는 성령이 잠정적이고 단편적으로 역사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은 본격적인 성령 시대의 개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사로 볼 때, 구약은 성부 시대, 주님이 오시고는 성자 시대, 주님이 부활 승천 후 오순절 성령강림부터는 성령 시대, 교회 시대입니다. 성령강림이 교회 시대의 첫 열매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보혜사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는 한자를 음역한 것인데, 보호할 보에 은혜 혜, 스승 사입니다.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분입니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합성어로 <파라>는 <~곁에>라는 뜻이고 <클레오>는 부르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 둘이 합쳐져서 <곁으로 부름받아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or, helper, comforter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내 가족, 친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나를 돕는 분이라는 뜻에서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주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까? 주님도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곁으로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고치셨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보혜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보호하고 격려하지 않으면 못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 성령 시대는 성령의 존재가 절대적이고, 성령충만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도행전 1장 4절에서 너희는 꼼짝 말고 여기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 두문불출하고 성령을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강력하게 불같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그들이 교회의 최초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서 우리도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력이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성령이 또 다른 보혜사로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우선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돕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모릅니다. 그들은 성령의 존재를 모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만 아는 존재입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거하시고 역사하기에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만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만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계시에 반응하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 허물을 지적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껴 회개합니다. 목사, 전도사, 교회학교 교사가 아니라 성령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나로 하여금 선한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인간적인 욕구가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장 13절도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누구도 맨 정신으로는 예수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성령에 붙잡혀야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 사소한 것이라도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2000년 전에 잠깐 왔다 가셨다는 예수를 믿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어떻게 제 정신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의 역사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들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갈팡질팡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낙향하여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령강림 이후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데, 그들은 목을 내대고 순교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우리에게 돈을 주거나 떡을 주지 않습니다. 무엇이 아쉽고 모자라서 신앙생활을 오래도록 지속하고 있습니까? 늘 힘들어 하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강제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강제 당해서 교회도 나오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상 성령의 작품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강제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면 그만큼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왜 빌 바를 모릅니까? 성경은 성령이 탄식할 정도로 우리가 빌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시를 쓰는데도 성경은 성령이 탄식할 정도로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시는 잘 써도 정작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횡설수설하고 중언부언합니다. 우리가 늘 구하는 기도의 제목을 되짚어 보십시오. 밤낮 썩어질 것들, 마침내는 나를 헤칠 것들만 구합니다.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대신 기도하십니다. 성령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도 우리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부디 성령충만합시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뜻에 나를 꺾어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 의지로 성령의 계시를 묵살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보혜사 성령이 우리 삶을 도우시기에 가능합니다. 성령이 도우면 그 어떤 최악의 상황이나 여건도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결말이 납니다. 최악이 최선으로 역전됩니다. 나는 절대 못하지만 성령은 능히 하시고도 남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보내는 성령이고, 질그릇은 우리들입니다. 성도도 세상을 살며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핍박도 받습니다. 그러나 질그릇에 담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기에 아무리 거꾸러뜨려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생한 간증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유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는 성령충만의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반대는 이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마가복음 3장 28절입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입으로는 성령충만을 원하나 삶으로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훼방하고, 대적하고, 근심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날마다 소멸하며 삽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성령충만이 아니라 성령을 소멸하며 삽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에 충만합시다.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이여, 늘 성령에 붙잡혀 삽시다. 그래야 여러분의 생애가 복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할 때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합시다. 성령의 계시에 결단하며 삽시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여러분의 삶이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욱 아름답고 강건하고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