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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편견과 선입견
설교본문 눅 13:1-5, 요 9:1-3
설교자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2018-04-15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80415m.mp3

20180415m

눅 13:1-5; 요 9:1-3

편견과 선입견


(눅 13:1-5, 개정)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요 9:1-3, 개정)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본문부터 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시각 장애인을 만납니다. 그 때 제자들이 주님께 묻습니다. 2절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질문은 참으로 친절9?)합니다. 보통은 ‘선생님, 이 사람은 왜 맹인으로 태어났을까요?’ 이렇게 묻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구 죄 때문에 맹인으로 태어났느냐고 합니다. 이미 죄 때문이라는 전제를 갖고 다만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본인의 죄냐, 부모의 죄냐를 묻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친절한(?) 질문에 어떻게 답하십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보기 2개를 다 거부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그 전제, 곧 죄 때문이라는 종교적 고정관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놀라운 파격입니다. 흔히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겪는 불행과 아픔과 재난을 죗값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 시대 유대인들이나 제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율법적 사고 때문에 그런 편견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자명한 종교적 편견을 깨뜨리십니다. 제자들의 선입견을 전면 부정하신 겁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고 주님은 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영광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영광을 위해 처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주님은 답하십니다. 


우리가 장애인을 대할 때 죄 때문이라는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 무엇을 하실까 라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적어도 장애인들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데도 제자들과 주님의 시각이 얼마나 차이가 큽니까!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손에 돌을 들고 그 여인을 치려고 합니다. 간음죄를 지었으니 율법에 따라 당연히 그렇게 처단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부터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주님 말씀으로 양심에 찔린 사람이 흩어지고 맙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같은 죄인을 바라보면서 군중들은 돌 맞아야 할 죄인으로 본 반면에 주님은 현행범이지만 여전히 가능성을 지닌 내일이 있는 존재로 본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그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만일 그 여인이 돌에 맞아 죽었더라면, 기독교사에는 성녀 마리아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고정관념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가능성의 존재, 새 출발하여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보십니다. 


누가복음 본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와 최근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끔찍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해 그 피를 예루살렘 성전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갈릴리 사람들은 반골 기질이 강했습니다. 로마에 저항했던 열혈당이나 젤롯당도 갈릴리 출신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눈에는 갈릴리 사람이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 중에 군사들이 닥쳐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 피를 성전 제물에 뿌립니다. 당시 로마 총독부는 그들이 반란을 꾀하려고 순례객을 가장해 예루살렘에 잡입했기에 일망타진했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 이하입니다.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시면서 주님은 또 하나의 예를 드십니다. 4절 이하입니다.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루살렘은 다윗이 약 740m 시온산 정상에 조성한 수도입니다. 그래서 거기엔 물이 귀했습니다. 성밖 동쪽 기드론 골짜기의 샘이 유일한 수원이었습니다. 히스기야 때 거기로부터 인공 수로를 만들어 실로암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물이 귀하다 보니 거기에 망대를 세우고 지키게 했습니다. 어느 날 망대가 무너져 거기 있던 사람 18명이 압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죄가 많아 그런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갈릴리 사람들의 사건을 전한 사람들도 그런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로암 망대에서 죽은 사람들이나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 죽은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불행한 사건 사고를 대할 때 어떤 종교적 전제나 고정관념을 갖고 바라보는 걸 몹시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재앙이나 사건사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미쳐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거기에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불행은 죄에 대해 저주를 받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진 아픔이 아니고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그 사람의 장애는 그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장애인을 대할 때 그들이 죄로 그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교만해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장애나 불행은 죗값이 아니라 주님의 특별한 뜻입니다. 종교적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장애인을 바라 봅시다.